from 서울. 나눔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잊지 않고 현관 밖으로 나갑니다. 꽉 찬 5리터짜리 종량제 봉투를 들고 말이죠. 아기 기저귀를 사용하다 보니 매일 하나 이상은 생겨나네요. 지정된 요일에 맞게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는 일도 중요한 약속이에요. 미루다 보면 상자가 넘쳐 아주 미운 모습이 되어버리거든요. 가족이 셋이 되니 확실히 배출하는 쓰레기가 늘었어요. 열심히 분리수거를 한다 해도, 급격하게 차오르는 쓰레기통을 보면 이대로 괜찮은 걸까 걱정이 되죠. 온전히 재활용되나 의구심도 갖게 되고요. 어제는 더는 사용 않는 지우 물건들을 챙겨봤는데 부피가 상당해요. 몇 개월 쓰지도 못한 채 손을 떠나는 물건들을 보니 생각 없이 사고 버릴 문제가 아니다 싶어요. 새삼 심각하게 느껴졌습니다.
빙하가 녹고 있다는 이야기.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된 경고예요. 면적이 줄어드는 얼음덩이 위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북극곰의 처연한 얼굴, 너무 익숙하죠. 20년도 더 됐을 거예요. 중학생 소녀 시절, 한창 쫓아다니던 연예인이 있었어요. 매달 나오는 잡지며 콘서트 영상이며 빠지지 않고 낱낱이 챙겨보곤 했죠. 여름에 열린 콘서트에서 미래 자신에게 쓴 편지를 읽는 대목이 있었는데, 기후 변화로 온도가 많이 높아진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냐 안부를 묻더라고요. 흠모 가득한 마음에 무슨 말을 하든 좋았지만, 한편으론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싶어 뜬금없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스쳐요. 너무도 당연하게 그땐 모든 게 깨끗했고 여유로웠잖아요. 미래를 그릴 때면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환경은 점차 나빠진다는 막연한 전제가 있어요. 앞으로 펼쳐질 날은 멀고 아득했으니 모두가 그리는 모습대로 대충 그럴지도 모르지 가벼이 여기며 살아왔네요. 실제 그리 될 거라 체감하진 못했던 것 같아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도 되지 않은 이때, TV에선 30년 만에 가장 더운 봄을 지났다는 뉴스가 들려요. 달고나가 녹아 철판에 흘러내리듯 온몸이 늘어지고, 습하고 뜨거운 바람에 자꾸만 에어컨 리모컨을 찾게 됩니다. 근래 기후 관련 소식이 자주 눈에 띄어요. 이미 자정 기능을 잃은 지구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기온이 올라가고, 당장 상승 속도를 늦추기 위해선 방안을 세워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호소가 이어집니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하죠. 인간이 살만한 환경은 몇 년도 남지 않았다는 예측에 잠든 지우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됩니다. 지금 세대, 지금 저의 손으로 만들어 낸 환경에서 살아야 할 지우. 과연 그때 지구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필요합니다. 지우가 태어나면서 절실히 깨닫게 됐죠. 어찌나 사야 할 것들이 많은지 목록으로 줄 세우고 보니 흰 종이 한 면이 꽉 차요. 방대한 육아용품 시장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이걸 다 사야 할까요? 겪어본 일 없는 신출내기에게 똑 부러진 판단은 무리네요. 괜히 사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주저해요. 그런 연유로 필요한 물건도 망설이다 사용 시기를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양육자를 흔들어대는 ‘육아는 템빨’이라는 말. 날이 갈수록 양육자의 편의를 살피는 섬세한 물건들이 세상 밖으로 마구 쏟아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순전히 양육자의 노동으로만 해결했던 문제들이 이제는 새로이 세상에 나온 신통한 제품으로 해결이 됩니다. 10년 전 아이를 낳았던 친구에게 분유를 타주는 기계가 있다 전하니 믿질 못하더라고요. 세상 좋아졌다며 말이죠. 알아서 뉜 아기를 흔들어주는 전동 바운서가 있고, 자동으로 콧물을 빼주거나 손톱을 갈아주는 기계도 있어요. 그런데도 쉬이 구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건 조금만 애를 쓰면 굳이 모든 걸 쓰지 않더라도 얼추 비슷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내 몸 편한 게 최고지 싶어도 조금만 더 부지런을 떨면 잠깐 사용할 이 제품들을 거치지 않을 수 있으니 고민이 되는 거죠. 대충 필요한 것들만 갖춘다 해도 출산을 앞둔 집은 아기 물건으로 포화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다시 가구 배치를 하기도 하고, 수납공간은 꼭 정리해야만 하죠. 아이와 함께하는 삶은 생각보다 많은 자리를 녀석에게 내어줘야 한다는 걸 깨달으며 좁다랗게 시작됩니다.
워낙 필요한 육아용품이 많기도 했고, 잠깐 사용할 물건들을 모두 사려니 부담이 된 건 사실입니다. 특히 대부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같은 경우, 월령에 따라 갖고 노는 취향이 빨리도 바뀌는데 때마다 사들이려니 괜한 죄책감이 들었어요. 버릴 때도 쉽지 않은 이것들이 얼마나 환경에 나쁜 영향을 줄까 걱정이 됐죠. 한 해 태어나는 생명이 얼마나 많나요. 앞다퉈 필수템이라 주장하는 모든 장난감을 사고 버린다면 그 양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고민 끝에 눈을 뜬 대안이 중고 시장이었어요. 무작정 새로 구매하는 것보단, 조금이나마 쓰레기 배출량을 줄일 수 있겠다 싶었죠. 귀찮음에 쇼핑도 즐기지 않았던 이가, 일일이 구매자와 판매자에게 말을 걸어 시간, 장소, 가격을 조율하는 고된 과정을 즐기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육아용품 중고 거래는 생각보다 치열했어요. 소위 ‘국민템’이라 이름 붙은 것들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민첩해야 했죠. 판매자와 일대일로, 대부분 선착순으로 거래되는 탓에 필요한 물건이 있다면 알람을 걸어두고 번개같이 움직여야 목표한 물건을 획득할 수가 있었어요. 임신 초기에는 성질 급히 직접 거래를 해왔는데, 점점 배가 불러오며 퇴근길 남편을 대신 보내다 보니 놓치는 물건이 빈번히 생기기도 했어요. 한동안은 괜찮은 매물을 쟁취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먼저 중고 시장을 뒤졌고, 살 게 없더라도 종종 거래 중인 육아용품을 구경하곤 했는데 시장에 자주 나옴에도 거래가 완료되지 않는 물건들은 대체로 아기가 오래 사용하지 않거나 크게 효용이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눈치껏 고심 끝에 산 물건들도 모두 지우에게 맞진 않았어요. 그럴 땐 재빨리 되팔며, 새 걸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안도하곤 했죠. 중고 시장은 사용하던 물건을 거래함에 사람들의 취향까지 따라오는 재미가 있지만, 반면 쉽지 않은 순간도 분명히 있어요. 물건 상태가 안내 글귀와는 딴판인 양심 불량 판매자도 꽤 만날 수 있었거든요. 불통의 판매자와 실랑이를 하다 보면 중고 거래를 택한 자신을 책망하며 후회가 마구 밀려오더라고요. 꼭 그런 판매자는 환불도 쉽게 해주지 않아요. 오가며 들인 시간과 노동. 상한 마음까지. 차라리 새것을 사서 쓰고 중고로 파는 게 낫지 않았을까 몇 번을 흔들렸습니다. 물론 무료 나눔이나 덤까지 챙겨주는 분들도 계셨지만 아이 물건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마음이 상하니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어요. 수십 번 거래해 보고, 또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이제는 판단이 제법 명확해졌습니다. 이건 새 물건이, 저건 중고로 사서 써보는 게 낫겠다 답이 나오죠. 아이 물건은 대부분 사용 기간이 짧아 중고 물품도 새것 같은 경우가 많아요. 양이 많아 부분 판매하는 거래도 잦고, 아이가 사용을 거부해 뜯기만 한 새 물건을 되파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육아 중인 지인들에게도 중고 시장을 이용하길 적극적으로 권해요. 저도 여전히 애용하고 있고요.
지우를 가졌을 때 아기 옷가지를 많이 사지 말라는 도움말을 자주 들었어요. 금세 큰다는 말만 철썩 믿고 정말 아이 옷을 하나도 사질 않았죠. 선물로 들어온 내복 몇 장만 믿고 있던 차, 친한 언니에게서 묵직한 짐 가방 두 개를 전해 받게 됩니다. 가방 속엔 아이 옷과 장난감, 이불이 꽉 차 있어요. 친오빠가 물려준 물건들이라며, 본인이 시집가면 쓰려고 했는데 언제 갈지 모른다는 농담을 던지며 모두 전달해 주더라고요. 사실, 오빠도 그렇고 친한 친구들도 일찍이 출산을 마쳐 주변에 아기 물건을 물려줄 사람이 전혀 없었거든요. 아쉬워하다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된 거죠. 모두 딸아이 것이었지만 뭐 어때요. 꼬물이 때는 뭘 입어도 귀엽잖아요. 무엇보다 신경 써 전해준 마음이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손사래 치는 언니에게 답례하고, 언니가 아기를 낳으면 쓰던 물건을 모두 주겠다 단단히 약속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가방을 풀어 하나하나 내용물을 살피는데 작은 아기가 썼던 물건에서 달콤한 향이 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어요.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이 소중히 썼던 물건이니 우리 아기한테도 잘 맞을 것 같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마주한 친구는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초등생 외동딸을 키우고 있는 그녀는, 아이 옷 하나 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살뜰히 골라 깨끗하게 입혀왔는데, 시기가 지나니 처리가 난감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네요. 딱히 물려줄 데도 없고, 준다 해도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아 더욱 고민이랍니다. 아이를 키우며 애정과 노력으로 들인 물건. 버리거나 헐값에 팔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물려준다는 건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까지 담아 전달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지우가 쓰던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면, 잘 써줄 사람을 찾느라 고심할 거예요. 단지 사용하지 않아 치워 버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아이의 시간과 추억이 담긴 물건을 원래 주인만큼 아끼며 귀중히 다뤄줄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바람은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요? 물건에 큰 의미를 두면 안 되는데, 어째 첫아기의 손때가 묻는 것들은 모두 애틋하게 정이 들어 버렸나 봐요. 지우가 하루하루 성장함에 따라 사용 시기가 끝난 물건들이 생겨요. 아직은 아쉬워 대부분 가지고 있지만, 곧 비워내야 함에 어찌할까 고민이 됩니다. 당장 주변에 전할 곳도 없고, 그렇다고 쓰레기로 처분하기도 아쉬워요. 중고로 팔아도 되겠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습니다. 기부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나에겐 사용 시기가 지나 필요 없어진 물건이 누군가에겐 마침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저도 어린 날엔 친척, 동네 언니들의 옷이나 인형을 꽤 물려받았던 기억이 나요. 적당히 사용감이 있어 폭 안기는 물건들이 참 좋았죠. 언니들이 사용했던 것이라니 왠지 좋아 보였던 후광 효과도 있었고요. 누군가의 사랑과 선택을 받은 물건에선 새것과는 완연히 다른 안락하고 친근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물려주고, 물려받는 행위. 예전에는 절약 개념이 강했지만, 요즘은 환경 문제도 더해져 다시금 관심을 가지는 것 같네요. 새 물건을 사는 것도 좋지만, 시간과 이야기가 담긴 물건을 주고받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예요. 아이와 함께 나눔을 실천해 보는 것도 좋고요. 주변을 살펴, 물건의 가치를 살리고 환경도 온전히 지켜낼 수 있겠죠. 내 아이를 위한 소비, 반짝이는 새 물건 대신 깨끗한 세상을 전달하는 것도 멋진 사랑의 표현 중 하나일 거예요. 우리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살아갈 아이들. 지금 우리의 행동으로 아이들의 미래가 확연히 달라질 수 있음을 알았으면 합니다. 가시적 현상들로 환경의 급변을 피부로 느끼는 지금, 이제 우리가 아이들을 위해 함께 가는 방법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