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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Mar 08. 2023

잘 자라 우리 아가

from 서울. 잠

 생활 방식이 맞지 않는 동거인과 지내는 건 꽤 고달픈 일입니다. 스무 살 이후, 오랫동안 가족이 아닌 타인들과 같은 현관을 사용하며 살았죠. 3인 1실이었던 기숙사, 여럿이 모여 한 지붕 아래 살던 하숙집, 고향 선배 언니와 처지가 맞아 함께 집을 구했던 경험까지. 예민하고 뾰족한 성미가 전혀 반영될 수 없는 빠듯한 주머니 사정으로 서울 상경 후 몇 년간은 그리 더불어 살았습니다. 이리저리 거처를 옮기며 어떻게든 적응해보고자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여럿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가장 조율이 어려웠던 잠 시간. 밤잠이 없는 탓에 동거인과 암묵적으로 정한 소등 시간 이후, 말짱한 어둠 속에서 억지로 눈을 감고 있는 게 참으로 고달프게 느껴졌거든요. 못내 흘러가는 밤이 아쉬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쓰고는 소곤거리는 음악을 배경 삼아 간신히 붙잡은 밤을 찬찬히 놓아주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곤 했었습니다. 상대를 배려한다 해도, 생활시간이 너무도 어긋난다면 각자 다른 동거인을 찾아 떠나기도 했었죠.     


 결혼 후, 고정된 동거인이 생겼습니다. 옛 인연들과는 달리 나만의 리듬을 강경히 고수 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되었음에도 절충할 부분이 없진 않아요. 함께 살기 전까지는 몰랐던 그의 독특한 수면 시간. 배우자는 매우 이른 저녁 기절하듯 곯아떨어져, 새벽 두세 시쯤 다시 깨어납니다. 일찍 잠듦에 하지 못한 일들을 그제야 부지런히 사부작대다 다시 잠이 들죠. 반면, 불면을 안고 사는 전 잠들기까지도 참말로 까다로워요. 잠자리에 들어도 한 시간 이상을 눈을 감은 채 뒤척거립니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온갖 생각들을 나름의 책장에 꽂아 정리한 뒤에야 간신히 정신을 놓아주죠. 안타깝게도 겨우 잠드는 이 시간이 배우자의 중간 기상 시간과 겹칠 때가 빈번합니다. 매번 인상이 찌푸려져요. 잠귀 밝은 이에게는 발꿈치가 들린 작은 발디딤도, 손으로 반쯤 틀어막은 휴대 전화 조명도 쿵쾅쿵쾅, 반짝반짝 요란하게만 느껴지니까요. 잠드는데 나름의 고충이 있어, 늦은 밤 그가 일으킨 소란에 노여움이 증폭됩니다. 화는 점점 잠을 깨우고 정신을 맑게 해 더욱 상대를 또렷이 원망하게 만들어요. 그리 잠을 깨워두고, 본인은 전원이 꺼지듯 다시 자버리니 더욱 억울할 수밖에 없고요. 서로 괴로운지라 몇 번을 고쳐보려 했지만, 잠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네요. 벌써 같은 잠자리에 든 지 4년 차지만 노력에도 각자의 수면 패턴은 예전과 다름없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조리원. 이땐 아기가 그냥 자는 줄 알았답니다.


 여기, 새로운 동거인이 나타납니다. 갓 태어난 지우죠. 이 동거인은 배우자와는 달리 제 생활 양식 따위 아랑곳하지 않아요. 모든 걸 자신에게 맞추라 온몸으로 주장합니다. 다른 방을 쓰기도 어렵고, 제 생활을 강요할 수도 없어요. 굉장히 난처한 상대를 만났습니다. 아이를 보며 가장 힘든 걸 꼽으라면 먹이는 것과 재우는 것이라 답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막 세상에 나온 아기는 통상 우리가 사용했던 ‘잠’이라는 말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잠’을 자는 생명체잖아요. 조각조각 나눠 자고, 짧게 자며 밤에만 자는 게 아닙니다. 녀석은 40여 년을 살아오며 체득한 잠의 개념을 하루아침에 격파해버리고 맙니다. 지우가 잠드는 시간은 꽤 오랫동안 예측이 어려웠고, 잠이 들기까지 긴 시간과 다양한 과정들이 필요했습니다. 홀로 자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잠을 재우는 게 가장 까다로운 과업이 되어버렸죠. 다른 일은 점점 익숙해지는데 어째 재우는 일만큼은 나날이 고난이 더해집니다. 양육자가 기술을 터득해 능력치가 향상되면, 녀석도 필살기를 바꿔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아이의 잠 패턴은 어느 시기까지 꾸준히 변모해, 늘 같은 방법으론 꿈나라에 보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자연히 아이를 재우느라 잠들지 못하는 양육자의 수면 시간은 고갈되죠. 양육자는 한번에 긴 잠을 자야 하는데, 요 작은 룸메이트는 자꾸만 조각 잠을 자며 곁에 있는 사람을 깨워댑니다. 신기하게도 지우가 잠든 뒤 겨우 눈을 감을라치면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뒤척대며 깨어납니다. 그렇게 지우와 저의 수면 시간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매번 어긋났습니다.      


한겨울에도 밖으로 안고 나가 한참을 걸어야 했죠.


 양육자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기는 결코 쉽게 잠들어 주질 않아요. 어느 날은 커다란 짐 볼 위에서, 어느 날은 거실을 정처 없이 걸으며, 또 어떤 날엔 집 밖으로 나가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 녀석을 꿈나라로 보내려 고군분투합니다. 시간, 조도, 습도, 온도, 소리, 움직임. 모든 걸 자료화해 최적의 수면 환경을 만들어주려 공을 들이죠. 곧 잠이 들 듯 보이면 부동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칫 다가오는 잠을 깨울까 노심초사하며 말이죠. 여전히 삐거덕거리는 손목과 발목으로 아이의 무게를 견디며 녀석이 잠들기만을 고대합니다. 웬만한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시간에도, 아기와 저는 깨어 있어요. 겁이 많은 탓에 아기를 재우다 보면, 체력적으로 힘듦도 느끼지만 고요한 어둠이 무섭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시차가 꽤 나는 곳에 사는 친구들에게 급작스레 연락해보기도 했어요. 육아 상담을 핑계 삼아 자연스레 대화를 트면 그래도 누군가는 깨어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두려움이 사그라들더라고요. 아무도 없는 깜깜 나라에서도 아기는 여전히 잠이 들지 않아요. 어둠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아기의 잠 때문에 더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네요.


 고작 몇 달 만에 양육자의 수면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총량이 줄었을 뿐 아니라, 늦게 잔다 해도 대여섯 시간이면 충분했던 사람이 병든 닭처럼 밝은 낮에도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진 거죠. 시도 때도 없이 눈이 감겨요. 모르게 잠드는 일도 왕왕 생깁니다. 불면으로 평소 푹 자고 싶다던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기절하듯 잠시 깔딱 잠을 자고 눈을 뜰 때면, 그간 잠들지 못해 고생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며 문득 겸연쩍어집니다. 그런데도 압도적으로 잠은 부족해요. 지우가 통잠을 자기까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지냈던 것 같아요.      

 육아는 버티는 거라 했던가요, 토끼잠을 자던 지우가 저녁에 누워 아침에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사이 지우는 안아주지 않아도 잠드는 아이가 되었어요. 물론 잠들 때까지 함께 누워있어야 하지만요. 불을 끄고 지우 곁에 누워, 어떨 땐 노래를 부르고 또 어떤 날엔 하루를 이야기하며 아이가 잠들길 기다립니다. 지우는 혼자 뒹굴뒹굴 이불 위를 구르며 뜻이 무척이나 궁금한 귀여운 옹알이를 끊임없이 해대요. 몇 번은 발길질로 제 얼굴을 차기도 하죠. 어느 순간 숨소리가 고르게 들린다면 재우기 성공. 아기 띠로 흔들어대길 몇십 분, 길게는 몇 시간이 걸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참 쉬워졌다 싶어요. 그땐 정말 잠이 웬수처럼 느껴졌거든요. 또 얼마나 울까, 얼마나 보챌까 몸과 마음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힘겨웠죠. 지우가 잘 때 함께 자고,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다면 체력적인 고통이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긴 쉽지 않았어요. 아기가 잠든 순간만이 오롯이 제 시간이잖아요. 남은 집안일을 차치하고 아기를 재운 뒤 무엇이라도 하려다 보니, 지우를 꿈나라로 보내기 위한 여정이 더 길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해요.      


조금만 더 자자, 아가.


 절대적으로 수면 시간이 부족했던 건, 잠들지 않는 지우보다 지우를 재운 뒤 뭔갈 하고 싶었던 욕망이 원인이었습니다. 낮엔 항상 블루투스 이어폰과 책 한 권을 곁에 두고, 지우 눈이 감기면 TV를 틀었고, 책을 펼쳤어요. 아기가 잘 때 쉬어야 몸이 그나마 견뎌낸다지만, 주어진 짧은 자유시간을 원 없이 누리고 싶은 알 수 없는 오기가 들더라고요. 무엇이라도 아기를 떼어둔 채 독립적 행위를 해야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거든요. 고단함에 지우를 따라 눕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억지로라도 버티고 버티다 끝내 고꾸라지듯 잠이 들곤 했어요. 절로 수면의 질은 바닥으로 내리치고, 머리는 멍해져 온몸이 붕 뜬 느낌으로 하루하루가 지나갔어요. 악순환이란 걸 알면서도, 도저히 포기가 안 되더라고요. 정서적 자유를 위해 체력적 고통을 택한 거에요.      


 이젠 나름대로 잠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여전히 수면 부족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되려 더 늦게 잠자리에 들곤 하죠. 가족이 잠든 뒤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도 달아요. 감기는 눈으로 잠깐이라도 불을 밝혀 책상 앞에 앉습니다. 부담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예요. 이 시간만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칭얼대는 아가가 없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대상은 곤히 잠들어 있죠. 읽던 책을 마저 읽거나, 일과를 정리하고 필요한 생필품을 주문하기도 합니다. 정신없이 흩어진 감정을 정리해 글을 쓰기도 하고요. 꼭 무언갈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큰 성과 없는 이 시간이 좋아 잠을 미뤄둡니다. 아이를 키우며 예전의 내 삶, 시간, 모습이 사라진다는 말을 많이들 하잖아요. 전 그렇게 피곤함을 누르고 악착같이 밤을 붙들고 앉아 여전히 나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해봐요. 양육자의 삶도 행복하지만, 저라는 한 사람으로서 갖는 행복이 우선이겠죠. 그리 정해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에도 여유가 생겨요. 자신을 차선에 두면 어느새 마음이 모가 나, 가끔은 아기와 배우자를 따끔하게 만들더라고요. 매일 아침, 조금만 일찍 잘 걸 후회해봐도 혼자만의 밤은 포기가 어렵습니다. 피곤함을 대가로 내어야 한대도 충분히 치를 수 있는 값이에요. 아침부터 시작된 육아의 보상이 항시 하루 끝에 기다리고 있다면 많은 게 달라지지 않을까요? 책상 위 시간을 가지고부터 마음의 고됨이 덜어진 걸 진실로 느끼고 있어요. 비슷한 나날에 기억이 섞여버리는 육아 생활에서, 잠시 여유를 내 제대로 된 마무리를 맺을 수 있으니까요. 깜깜한 밤, 책상 위로 펼쳐진 환한 시간 속에서 오늘도 조금만 더 놀다 자야겠어요. 내일 후회한대도 어쩔 수 없죠.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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