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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Mar 12. 2023

모두 모여라!

from 서울. 놀이터

 지우의 손가락이 새카맣게 탔어요. 낮은 콧잔등도, 아직 통통한 팔다리도요. 다 놀이터 덕분이죠. 어린 기억 속 놀이터는 모래가 가득했어요. 페인트가 벗겨진 철재로 만든 시소와 미끄럼틀, 꼭 짝이 맞는 그네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비가 오면 바닥에 깔린 모래가 단단해져 평소보다 조형미 넘치는 성과 굴을 팔 수 있었죠. 지금은 딛는 모는 곳이 폭신폭신해졌고, 모래 놀이터는 작게 축소되어 한 편에 따로 자리하고 있답니다. 여전히 인기도 많고요. 그리 변한 놀이터를 오랜 시간 뒤 다시 찾은 건, 지우가 혼자 걸음을 떼기 시작하면서예요. 아이를 유아차에 싣고 동네를 휙 돌던 데서 벗어나, 안전띠를 풀어 바닥에 내려주면서부터죠. 아이의 서툰 걸음에도 넓고 트인 놀이터만큼 안전한 장소는 없더라고요.


마음만 앞서던 시절.


 처음엔 여전히 불안한 발을 딛는 녀석에게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어요. 다른 건 볼 여력이 없었죠. 부딪히거나 넘어지진 않는지 지우 등짝만 쳐다보고 있었네요. 놀이 기구를 탈 수 있을 만큼 몸이 단단하지 않아 손을 잡고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만 하던 녀석이 한두 달 사이 이리 급변할 줄 그땐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아이가 탄 그네를 보탬 없이 500번 정도는 밀고 있어요. 소위 ‘놀이터 노역’이 시작된 거죠. “내릴까?”하고 물어보면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대죠. 14개월짜리가 이리 의사 표현이 뚜렷할 일인가요. 하는 수 있나요, 성에 찰 때까지 밀어드립니다. 키보다 높은 미끄럼틀은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로 타야 하는데 미끄럼틀 꼭대기까지 도달하는 게 또 쉽지 않아요. 자기주장을 시작한 지우는 꼭 계단을 자력으로 올라가려 하지만, 다리는 이런 주인 맘을 몰라주네요. 손을 잡고 아이를 들다시피 계단을 밟아가며 가까스로 정상에 오르면 하강은 또 눈 깜빡할 새에요. 녀석의 재촉에 곧장 다시 올라야 하니 쉴 틈이 없습니다. 내려온 미끄럼틀을 거꾸로 역류하려는 고집을 뜯어말리는 일도 만만치 않아요. 연어처럼 역행하려는 본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혹여 내려오는 아이와 부딪힐까, 버티는 지우를 억지로 떼어내 다시 계단에 발을 올려둡니다. 모든 게 쉽지 않아요.      


 그런데도 하루 세 번 정도는 놀이터를 찾아요. 시작은 지우가 심심할까, 답답할까였지만, 지금은 제가 살기 위해서죠. 집 안에선 지우의 신경이 온통 저에게 쏠려 있어요. 제한된 공간에서 뜨거운 시선을 받아 가며 함께 노는 것도 어떤 날엔 말할 수 없이 힘겹더라고요. 밖으로 나오면 어쨌든 지우의 시선을 끄는 넓은 세상이 있고, 대상들이 있으니 한결 저와 둘 사이의 평화가 유지됩니다. 사는 마을엔 놀이터가 여럿이라 참 다행입니다. 작은 공원 사이사이에 있는 놀이터엔 뛰노는 아이들 뿐 아니라 무성한 꽃과 나무, 많은 곤충과 새도 만날 수 있어요. 어느덧 지우도 벌써 놀이터 경력이 3개월이 넘어가네요. 이젠 놀이터 근처만 와도 유아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어서 내려달라 엉덩이를 들썩거려요. 실제로 온몸을 흔들어대죠. 그냥 지나칠라치면 난리가 납니다. 놀이터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이것저것 싸 들고 나오던 두 손도 점점 가벼워져요. 아무 준비 없이 걸어 나가기도 하니까요. 집 안과는 다른 바깥공기에 굳었던 몸과 마음이 풀어지고, 낯이 익숙한 이들을 마주치며 놀이터 방문에 점점 재미가 붙습니다. 하루 중 놀이터만큼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많은 곳이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고요.     


이젠 제법 놀이터가 익숙한가봐요.


 놀이터를 찾는 시간은 대중없어요.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도, 덥지 않은 계절엔 해가 꼭대기에 뜬 한낮에도, 캄캄해진 밤에도 나가 놉니다. 놀이터는 늦은 오후 시간에 가장 활기를 띠어요. 어린이집이며, 유치원을 마칠 시간이 돼야 아이들이 몰려오니까요. 그리 모인 아이들은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오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죠. 지우도 혼자보단, 북적거리는 장소에서 좀 더 활발히 뛰어노는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아이들로 꽉 찬 시간에 맞춰 나가려 노력해요. 함께 어울려 놀진 못하더라도 형이며, 누나들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게 지우에겐 흥미를 일으키는 듯해요. 가끔은 큰아이들 사이에 치여 휘청거릴 때도 있지만, 그러면서 또 아이들만의 세계를 익혀가지 않을까 싶어요. 아직 질서를 몰라 누군가 타고 있는 그네를 타겠다 보채면 난감할 때도 있지만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면, 놀이터로 오세요. 놀이터엔 아이의 손을 잡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죠. 엄마, 아빠, 이모, 삼촌, 할머니, 할아버지, 돌봄 선생님까지.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잠깐만 주시해도 두 사람 간에 관계가 금방 파악이 됩니다. 자연히 다양한 관계 속에서 다채로운 양육자의 태도도 살펴볼 수 있어요. 아이와 놀아주는 방법도, 무언갈 알려주고 해결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습니다. 개중 되도록 양육자로서 좋은 자세만 가려 보려 노력해요. 지우가 그네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경황없이 아이를 무릎에 태우고 같은 방향을 보고 앉았었어요. 아이가 떨어질 것 같아 발 구르기가 잘되지 않더라고요. 어느 날, 아이와 마주 보고 그네를 타는 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죠. 이후론 마주 본 자세로 아주 신나게 지우와 그네를 타고 있습니다. 별것 아닌 것도 알려주는 이가 없으니 서툴 때가 있는데, 이렇게 어깨너머로 얻게 되는 기술들이 꽤 유용해요. 평화로운 놀이터에서 일어나는 가장 유익한 학습은 따로 있는데요, 바로 이견 조율 및 갈등 해결에 관한 기술입니다. 놀이터에서 매일 빠짐없이 실랑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세요? 머무르고 싶은 자와 떠나고 싶은 자. 집에 가려는 양육자와 더 놀고 싶은 아이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항시 진행되고 있거든요. 양육자들은 쌓인 내공만큼 사용하는 전술이 화려합니다. 놀이터 바깥에 매혹적인 존재가 있음을 알리는 유혹형, 자신은 먼저 가겠노라 선포하는 으름장형, 힘드니 집에 가자 호소하는 애걸복걸형, ‘집에 갈까?’를 무제한 반복하는 질문형, 제한 시간을 알려주는 통보형, 소리를 높이는 분노형, 작은 아이의 경우는 겨드랑이를 잡혀 옮겨지는 강제집행형까지 당하기도 하죠. 대부분 양육자가 승리해요. 아이들은 언제나 놀이터에서의 시간이 아쉬울 듯해요.   

  

비가 와도, 더운 여름 날에도 놀이터 방문은 계속됩니다.


 지우와 놀다 보면 곁으로 다가오는 아이들도 꽤 많아요. 지우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결국은 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죠. 두 살인 지우를 소개하면 아이들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나이와 형제 관계, 다니고 있는 기관에 대해 털어놔요. 꾸밈없는 모습이 말도 못 하게 귀여워서 자꾸만 이야기 끝을 놓지 않고 이어나가게 됩니다. 형이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주체할 수 없는 뿌듯함과 이제는 서서 그네를 탈 수 있는 멋진 기술에 대해 여과 없이 들을 수 있어요. 정말 재미있는 건 세상모르는 지우에게 “이건 형이 돼야 할 수 있는데.”, “이건 누나 건데, 한 번 가지고 놀아도 좋아.”라며 우쭐거리는 모습이에요. 지우보다 서너 배 나이 많은 형과 누나들, 얼마나 멋진 가요. 이제는 낯이 익은 아이들도 있어 다시 만나는 작은 즐거움이 놀이터를 찾는 재미를 더합니다. 지난주엔 집으로 초대하겠다는 꼬마까지 나타났죠. 지우와 비슷한 월령의 아이들을 만나는 반가움도 커요. 나도 모르게 “아이가 몇 개월이에요?”를 외치고 있죠. 그때만큼은 고질병인 쑥스러움보다 상대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훨씬 더 커져 버리네요. 또래 아이를 보면 왜 그리 들뜨는지 모르겠어요.     


놀이터 한쪽에선 양육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가볍게 음료나 다과를 차리고 아이의 기관 가방을 들고 있네요. 조리원 동기조차 없던 저는 먼발치에서 놀이터 곳곳에 뭉쳐진 무리를 가만히 바라봐요. 언젠가는 저도 지우가 다니는 기관에서 만난 보호자들과 차 한잔을 하고 있을까요? 은근히 낯 가리는 성격 탓에 되레 숨어 다닐지도 모르겠어요. 한 번은 지우와 덩치가 비슷한 아기를 데리고 나온 분께서 아주 적극적인 자세로 다가오신 적이 있어요. “자주 나오세요? 몇 시쯤 나오세요? 아기는 몇 개월이에요? 어디 사세요?” 연이어 묻기 시작하셨죠. 혼자 육아하기 버겁다 느낄 때마다 함께 할 동네 친구를 애타게 찾아댔었지만, 막상 그 자리에서 경계의 눈초리만 잔뜩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머뭇머뭇 쭈뼛대다 자리를 이탈한 지우를 핑계 삼아 모두 답을 드리지 못했어요. 얼마나 무안하셨을까요? 호의를 거절한 것 같아 미안하면서도, 급작스레 다가오는 관심은 부담스러웠던 모호한 마음. 아이들과는 대화를 잘 이어가지만, 양육자와는 힘들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누군가와 커가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 관계에 쏟아야 하는 힘이 벌써 부쳐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공감대를 가진 어딘가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또 강렬히 자유롭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이 묘한 성미, 과연 놀이터 모임에 합류할 수 있을까요?     


누나와 형들 사이에 끼고 싶은 1세.


 오늘 아침도 새벽부터 깬 지우를 데리고 놀이터를 찾았어요. 여름이 다가오는 요즘은 볕이 놀이터를 갈 시간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됐죠. 아침 아홉 시만 되어도 눈이 부시니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인 이때가 딱 적기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더위가 잦아드는 저녁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거든요. 야외 놀이터는 햇살을 막아주는 장치가 없어 한낮엔 모든 게 뜨거워져요. 그나마 비 소식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장마철에는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벌써 걱정되네요. 이른 아침 놀이터엔 어젯밤, 열심히 놀다 간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놓고 간 옷가지, 안경, 먹고 버린 과자 봉지들. 어떤 날엔 끊어져 버린 그넷줄에 웃음이 터진 적도 있답니다. 대체 얼마나 신이 나 그리 격하게 탔던 걸까요. 지우를 바닥에 내리고 운동화를 고쳐 신습니다. 우리도 못지않게 신나게 놀아야죠. 딱 두 시간, 지우야 신나게 놀다 가자!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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