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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Mar 19. 2023

오늘은 어디 갈까?

from 서울. 외출

 6월 이른 장마가 시작됐어요. 휴대전화 속 일기예보 창에는 열흘이 넘도록 해가 보이질 않네요. 아직 비와 밖에 나가 뛰어놀 수 없음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우는 아침부터 현관 앞에 앉아 열심히 운동화를 제 발에 끼워 넣고 있어요. 나가자는 의사 표현이죠. 단 한 번도 짝 맞추기를 성공한 적 없지만 집중한 동그란 뒷모습이 때마다 귀여워요. 녀석의 간절함을 알기에, 어딘가 가야 했죠. 비를 맞고 다닐 순 없으니 쾌적한 실내로. 저도 강력한 의지로 나가고 싶었고요. 이대로 집에만 있다간 극명한 에너지 차이로 우리 사이가 멀어질 것만 같았거든요.      


 수영도 못하는 물 겁쟁이인 제가 물고기는 참 좋아해요. 지우가 갈만한 곳을 찾는다 해도, 어딘가 양육자의 취향이 잔뜩 묻어있는 선택, 아쿠아리움. 들어가면서부터 물 만난 고기가 된 건 바로 저였습니다. 물속에 사는 생명은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유려한 몸짓이란. 일종의 동경일까요? 처음 만나는 파란 투명함에 설렘이 마구 솟아납니다. 지우도 꽤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산호나 해초에 섞여 찾기 힘든 작은 물고기엔 반응이 없었지만, 덩치가 있는 녀석들을 발견하고는 한참을 바라보네요. 요즘 지우는 사람 외의 동물을 모두 ‘멍멍’이라 부르고 있는데, 수족관을 가리키며 역시나 ‘멍멍’이라고 외칩니다. 물속에 사는 멍멍이라, 그러고 보니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별 관심 없으면 어쩌나 염려했는데, 나름 데려온 보람이 느껴져요. 지우가 잉어 먹이 체험이 한창인 낮은 수조에 손을 담가 당황했지만, 바로 옆 낮은 세면대가 있어 뒤처리가 어렵지 않았어요. 아마 똑같은 지점에서 같은 행동을 하는 꼬마 관람객이 많나 봐요. 아이와 저, 모두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 뒤 비를 뚫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우를 만나고, 한동안 뜻대로 외출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빠져있던 날이 있었어요. 24시간 저의 손길이 필요한 녀석, 때와 장소를 가릴지 모르니 어디서나 울고, 자고, 밥을 먹고 대소변을 보죠. 양육자가 된 저는, 몇 달 전까지 자주 다녔던 도서관, 미술관, 박물관, 카페, 근사한 식당에 정중히 작별을 고합니다. 정숙이 필요한 장소는 선뜻 발을 들이기가 어려워졌거든요. 아기를 얻은 동시에 제 몸 어딘가 알람이 붙은 것처럼, 언제 울릴지 모를 녀석의 울음 덕에 조용하고 엄숙한 곳에선 적막을 깨는 주인공이 될까 두려움이 컸습니다. 자연히 조금은 번잡하고 일상 소음이 가득한 장소를 선호하게 되었죠. 앞선 장소들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고요하기까지 한 그곳에서 방문 목적보다 아이에게만 집중하다 보니 지우의 작은 칭얼거림에도 화들짝 놀라 득달까지 밖으로 빠져나오게 되더라고요. 한 번은 TV를 보다 뮤지컬을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어요. 엄청난 공연광은 아니지만, 일 년에 몇 편정도는 꾸준히 관람해 왔는데,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나 떠올리니 당최 기억이 나질 않더라고요. 막연히 티켓 예매 사이트를 뒤져, 마침 한 달 뒤 집 근처에서 열릴 공연을 예매해버리고 말았어요. 한 자리니 그리 어렵진 않더라고요. 어떻게든 방법은 있겠지 생각했으나, 웬걸요, 약속된 날짜가 다가옴에도 해결 방안은 실마리도 찾을 수가 없어요. 돌쟁이 지우와 함께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배우자에게 맡기고 가자니 시간이 맞질 않고, 주변에 아기를 봐줄 사람은 없죠. 결국, 취소. 안될 걸 알면서도 괜한 객기를 부린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디 집에 머물길 애정하는 이 임에도 타의로 밖을 나서지 못하니 온습도가 완벽히 맞춰진 집 안에서도 숨이 턱턱 막혀옵니다. 어디든 가고 싶다 다니고 싶다 휴대전화 속 다른 이의 하루를 보며 격정적으로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네요.    

  

 육아는 한 치 앞을 모릅니다. 해가 바뀌니 상황도 완전히 달라졌죠. 기동력이 장착된 지우와 바깥공기에 목마른 저는 꽤 괜찮은 한 팀이 되어 이전과는 판이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매일 어디론가 나가죠. 되려 집에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어요. 제 의지대로 걷기 시작하는 아이는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거든요. 집에만 있다간 시간이 멈춤을 체험하고, 나만 바라본 채 사랑을 갈구하며 지독한 집착을 보이는 광팬을 만나게 될 거예요. 끝나지 않는 눈물의 팬 미팅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 적합한 장소를 진취적으로 찾아봅니다. 특별한 기준은 없어요. 아이 움직임에 큰 위험 요소만 없으면 일단은 합격이죠. 영유아 휴게 공간이나 기저귀 교환 장소가 있다면 추가 점수가 부여되고, 아이를 대상으로 한 볼거리와 놀잇거리가 있다면 엄지를 치켜세우게 됩니다. 여기에 제가 누릴 수 있는 거리까지 있다면 완벽하죠. 절대적으로 정숙이 필요한 장소는 어려워요. 웹을 통해, 때론 육아 중인 지인에게서 정보를 얻기도 합니다. 제가 가고 싶은 장소를 찾아 지우가 갈 수 있을까 가늠해보기도 하고, 반대로 지우에게 흥미로울 만한 장소가 있다면 제가 재미를 찾으려 노력하기도 합니다. 꼭 어릴 적 친구와 혹은 연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순간처럼, 우리 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장소를 찾아내야 함이 신이 납니다. 요 조그만 녀석이랑 어딜 가볼까, 어디서 놀아볼까 고민으로 가득 하나 괴롭진 않아요. 지우와 함께라 가보지 않은, 어쩌면 가볼 생각도 해보지 않은 곳까지 발을 옮기게 되니까요. 생각만 하고 미뤄뒀던 장소도 실제 갈 수 있게 되었죠. 아이 덕분에 도전하고 시도해 봐요. 혹 가능할까 주저하던 곳을 성공적으로 방문하고 왔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관심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첫 독립 출판물을 마무리 지을 때쯤 마을 구립 도서관을 즐겨 찾았어요. 곧 가까운 곳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죠. 반듯한 네모 건물 사이에 자리한 낮은 한옥. 도서관임을 알리는 나무 현판과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펼쳐진 넓은 마당. 평소 고택과 어린이 책에 관심이 많던 저를 위한 완벽한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어린이’란 단어가 붙은 지붕 밑에서 본인이 어린이가 아님에 선뜻 발을 들여놓지는 못했지만, 낮은 담장 밖에서라도 고개를 기웃대며 뜨거운 관심을 표하곤 했었습니다. 지우를 낳고 꼭 함께 방문해 봐야지 다짐했던 장소. 실은 제가 더 가보고 싶은 곳이 되어버렸죠. 지우가 14개월이 되던 일요일, 드디어 우린 손을 잡고 대문을 넘습니다. 아직 도서관을 찾기엔 너무 어린가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지우 월령보다 훨씬 어린 아기들을 위한 촉감 책도 갖춰져 있다는 걸 찾아보고는 충분히 방문해도 되겠다 판단했어요. 어린이 도서관엔 영유아 열람실도 따로 자리하고 있어요. 낮은 책상과 편안한 쿠션이 깔린 곳에 손놀림이 익지 않은 아기들에게 적당한 종이 두꺼운 책도 여러 권 꽂혀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많은 양육자가 아이를 데리고 열람실에 앉아 소리 내 책을 읽어주고 있었어요. 아직 혼자 책을 읽을 수 없는 나이니 자연스러운 모습이죠. 책에 오래 집중하지 못해도, 또래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서 수많은 책을 접하고, 관심 있는 책을 손끝으로 꺼내 보는 경험이 아이에게 기분 좋은 자극이지 않을까요. 다행히 지우도 집이 아닌 새로운 장소에서 몇 배나 많은 책에 둘러싸여 즐거운 모양입니다. 어린이를 위해 특화된 공간이니 모든 것이 편안해 더욱더 좋아요. 공간도, 편의 시설도 모두 어린이를 위한 맞춤이네요. 지우에겐 이르지만, 아이들 눈높이에 꼭 맞는 다정한 프로그램들도 쉼 없이 진행되고 있어요.     



 도서관에서 지우가 깜빡 잠이 들 때면 틈을 기회 삼아 그간 보고 싶던 그림책과 이야기책들을 찾아보곤 해요. 원체 그런 부류의 책을 좋아했지만, 지우를 낳고 나선 더욱 관심이 가네요. 아이에게 좋은 책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그런가 봐요. 계속 사들일 수도 없으니 이렇게 도서관을 십분 활용합니다. 선별한 책을 사 읽을 때는 알 수 없는 뜻밖의 행복. 도서관에서 우연히 좋은 책을 만난 날은 하루 피로가 그 책 한 권에 모두 녹아버리기도 합니다. 대체로 책 속엔 웃음과 따뜻한 세상이 가득하니까요. 소장하고 싶은 책은 따로 제목을 메모해 두기도 해요. 보고 싶었던 책과 순간 눈에 띄는 책을 모조리 꺼내 잠든 지우 옆에서 숨죽여 읽어요. 지우를 앞세워 찾은 곳에서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사람은 저네요. 육아하느라 책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아이를 보면서 읽고 싶은 책도 동시에 읽을 수 있다니 얼마나 득이 되는 시간인가요. 혼자 책을 볼 때면 지우가 조금만 더 푹 자주길 바라는 철없는 바람을 가지기도 한답니다.      


 아이도 그리고 양육자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는 건 대단한 기쁨입니다. 아이만을 위한 장소나 양육자만 편한 장소에선 서로 힘들어질 때가 있잖아요. 지우는 쇼핑몰을 아주 따분해하더라고요. 지우 덕에 어딘가를 찾을 때면, 저도 그 시절로 돌아가 부족했을지도 모를 꼬맹이 때의 시간을 채워본다 상상해요. 아이 혼자 놀리기보다 같이 즐기니, 부담도 줄고 시간도 수월히 지나갑니다. 아이를 돌보는 게 아니라, 함께 놀러 나온 거라 여기죠. 혼자 보내던 시간을 항시 아이와 둘이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미 많은 길을 홀로 걸어봤던 터라 떨어질 수 없는 요 귀여운 녀석의 손을 오래도록 잡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에 든든한 기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이로 인해 신경이 닿지 않았던 세상을 보고, 해보고 싶은 일이, 가보고 싶은 장소가 나날이 늘어 아래로만 고꾸라지던 하루에 활기가 붙는 느낌이 들어요. 경험하지 못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항상 새로울 순 없으니 언젠가는 부담으로 다가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기대가 커요. 내일은, 모레는? 또 그다음 날은? 우리가 어디에 있을지 머릿속으로 그려봅니다. 지우가 지난날을 모두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내일의 지우는 오늘을 기억하지 않을까요? 부디 아이도 저와 같이 걷는 길을 좋아해 주길 바라며, 이번 주말엔 잠시 이별을 고했던 미술관에 가볼까 해요. 우린 성공할 수 있겠죠?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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