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녕 Mar 22. 2023

오랜 보금자리

from 서울. 할머니, 할아버지

 지우와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인 아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어요. 주도적으로 아이를 보시기도 하고, 주 양육자 곁에서 도움을 주고 계실 때도 있지요. 한결같은 모습은 아이를 바라보는 어르신의 얼굴엔 항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한 번씩 고됨이 느껴지는 저로서는 그 무한한 애정이 부럽기만 하죠.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에게 말을 걸고 웃어주세요. 아무래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은 훨씬 넓은 품을 가진 듯해요. 문득, 지우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좀 더 자주 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봐요. 저도 할머니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터라, 아이도 그 깊은 애정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운 거죠. 저와 배우자,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다른 지역에 계셔 뵙기가 쉽진 않아요. 오늘도 아이와 찾은 도서관에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이 모두 함께 나온 가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괜한 아쉬움을 가져봅니다. 지우도 두 분을 쉽게 만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랑 속에서 자랄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이 나네요. 

     

 사랑은 말보다 행동이라고 하죠?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던 할머니에게서, 무척이나 따뜻한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자라왔습니다. 집 안에서도 폴폴 입김이 나던 한겨울, 할머니는 아랫목 이불속에 늘 제 옷을 바르게 개켜 두셨어요. 혹여 찬 기운이 밸까 염려하신 거죠. 여름이 오면, 냉장고 속은 복숭아로 가득했어요. 밥 대신 복숭아를 먹고사는 손녀를 위해, 장에 가신 할머니는 떨이로라도 복숭아를 구해야 집에 오는 걸음이 편해지셨대요. 저녁이 되면, 어느덧 당신보다 덩치가 커진 손녀를 무릎에 뉘고 살포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셨고, 저도 그 작은 품을 파고들며 하루 있었던 중요치도 않은 이야기들을 재잘거리곤 했었습니다. 할머니의 사랑은 세련됨이 없어도 순진하고 심심한 데가 있어 따뜻했어요. 사랑한다 말로 주고받은 적은 없지만, 우리는 서로를 가장 많이 생각했습니다. 할머니에게 특별한 존재임이 행복했고, 뭐든 해드리고 싶어 후회 없이 행했던 것 같아요. 몇 해 전 갑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받은 상실감이 이루 말도 다 할 수 없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사랑은 평생 저를 단단히 버티게 할 무한한 힘이라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가슴에 묻어둔 할머니를 다시 떠올리기 시작한 건, 몇 해 전 배우자를 만나면서였어요. 그는 조금 특별한 형제 관계를 가지고 있죠. 아들만 여섯인 집, 막내. 게다가 어머님이 마흔이 넘어 보신 늦둥이였습니다. 결혼할 당시에도 어머님은 여든이 훌쩍 넘으셨어요. 실제 할머니와도 몇 살 차이가 없으신 거죠. 어머님의 모습에서 할머니를 떠올렸다면 조금은 이상한 관계도가 형성되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처음 뵌 날부터 예비 시부모님으로의 어색함보다, 어르신으로의 친밀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으니까요. 유별난 할머니 사랑에 친구들은 백발이 저의 약점이라 놀릴 때가 있어요. 어머님, 아버님을 뵐 때가 딱 그랬죠. 시댁이 때론 어렵기도 한데, 그보단 두 분이 돌아가신 할머니와 동일시되며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을 표할 대상을 찾은 듯 반갑기만 했습니다. 아들인 배우자는 연로하신 부모님이라 이해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하지만, 되려 한참 연세가 많으신 시부모님이라 한결 마음이 편안했어요. 두 분이 쭉 살고 계신 시골집도 땅과 푸름이 좋아 어릴 적 뛰어놀던 할아버지를 댁을 연상시켜 정겹기도 했고요. 모든 연유로, 어머님, 아버님이 계신 전라북도 고창에 가는 걸 즐거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마당에 아궁이가 있는 시골집, 기차를 타고 내려도 한 시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동네. 마을 사람들과 집안 대소사를 나누는 문화가 여전한 그곳을 다녀오면 마음이 꽉 차고 포근해졌어요. 정기적인 고창 나들이는 그런 제 욕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두 분께선 별 일없이 뭣 하러 오냐 말씀하시지만, 항상 돌아오는 길 마주 잡은 손엔 아쉬움이 가득하세요.      



 지우가 난 뒤, 어머님, 아버님이 변하셨어요. 곧 내려갈 거라 미리 전화를 드리면, 바쁜데 오지 말라 하시던 말씀이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는 답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손주인 지우를 매일같이 보고 싶어 하세요. 처음 지우를 데리고 갔던 때가 생각나네요. 두 분이 연로하신 탓에 서울 상경이 쉬운 일만은 아니에요. 게다가 코로나 기세가 사그라들 줄 모르니 한참 만에야 막내 손자를 만나게 되셨죠. 소일거리 겸 밭일을 보시는데, 도착한 저희를 보고는 앉은뱅이 의자를 허리춤에 단 그대로 달려 나오시더라고요. 지우는 낯을 가리는 편이 아님에도 어찌 된 일인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다가오시는 두 분 손길에 놀라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제 품에 붙어 한참 생경한 대상을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었죠. 첫 방문이 썩 성공적이지 못했어요. 아이를 안아주시려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지 않으려는 지우의 몸부림 사이에서 한참 애를 먹었거든요.


 한적한 오후엔 지우를 유아차에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아빠가 나고 자란 마을에 그대로 살고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덕에 지우는 아빠의 유년 시절을 만날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요. 아빠의 고향은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산 아랫마을에 자리하고, 아빠가 어릴 적부터 뵀던 분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살고 계십니다. 꽤 시골이라 어린아이가 드무니 지우의 등장이 주목받기도 하네요. 볕 아래 바짝 쪼그라든 빨간 고추와 땅콩, 처음 보는 광경에 달려들어 헤집기 바쁜 지우. 모든 게 웃음을 자아내 평화롭습니다. 불이 빨리 꺼지는 시골 저녁, 지우를 안고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아직 경험은 없지만, 숲 속에서 밤을 맞는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풀 벌레 소리만 가득한 캄캄한 어둠. 건물 빛도 없는 적막한 이곳이 다른 세계처럼 다가오네요. 오는 길이 쉽진 않았지만,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탓에, 자주 이곳을 보여줘야겠다 결심이 섭니다. 지우는 참 좋은 곳에 긴 세월이 담긴 보금자리를 뒀어요. 저녁엔 빨간 고무 대야에서 목욕하는 특별한 경험도 했고요.  

   


 지우를 번쩍 들어 안아주실 순 없지만, 두 분께서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하십니다. 아이 몸체만 한 수박을 사다 찬물에 담가놓으시고, 행여 벌레에 물릴까 모기향을 이곳저곳에 심어놓으셔요. 굳이 안방을 내어주고 낮잠을 강권하며 방문을 닫아버리시기도 합니다. 그럴 땐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내심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웃음이 나요. 직접 짠 참기름이며 농사지으신 채소, 과일들을 보따리로 묶어 하나라도 더 들려 보내려 애를 쓰십니다. 덕에 지우는 알짜배기 참기름을 먹고 잘 자라고 있어요. 내내 지우를 쫓아다니시며 말을 걸고, 한 번이라도 더 쓰다듬으려 지우 곁에 붙어 서십니다. 늦둥이 아들 덕에 14년 만에 본 손자이니 얼마나 이쁘실까요. 제가 할머니에게서 받았던 따스한 햇살 같은 사랑을, 지우도 고대로 받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닫습니다. 어르신들이 보여주신 마음이 제 속에 깃든 할머니의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죠. 애정이 꼭 만난 횟수와 비례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어머님, 아버님께선 아직 옹알이도 못 하는 손자의 울음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주세요. 지우 얼굴을 보기 위해 최근 휴대전화도 스마트 폰으로 바꾸셨죠. 여든이 넘어 사진 기능을 배우려 애쓰시는 모습이 뭉클하기도 합니다. 제 눈에도 넘치는 지우가, 할머니 할아버지에겐 얼마나 곱게 보일까요? 지난 방문엔 휴대전화에 지우 사진을 더 많이 남겨드리고, 배경화면으로 지우와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을 저장해 드렸어요. 굳이 휴대전화를 열지 않아도 자주 손자를 볼 수 있도록 지우 사진을 담아 커다란 벽걸이 달력도 만들어 드렸죠. 헤어질 때마다 속상할 만큼 서운해하시는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여전히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가는 일은 수월치 않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를 뵙는 게 지우에게도 저에게도 기대되는 시간입니다. 첫 여정엔 지우가 너무 어렸고 그 덕에 따르는 걱정이 많아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어느 순간부턴 갈 곳이 있다는 게 여행 계획이 잡힌 것 마냥 기분 좋아요. 늘 지우를 보고 싶어 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죠. 시간이 허락될 땐 마을 주변도 둘러볼 수 있으니 겸사겸사 좋은 일뿐이네요. 이번 주말에도 고창에 갈 계획이에요. 그새 쑥쑥 자란 지우를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시겠죠? 지우 돌을 치르며 찍은 사진도 액자를 해뒀어요. 그렇게 시골집에 점점 지우 사진이 늘어나네요. 늘 무한한 사랑만 주시는 두 분 덕에 지우는 좀 더 행복한 아이로 자라날 거예요. 이번에도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길. 할머니, 할아버지와 정겨운 추억을 하나 더 남기고 돌아오겠습니다.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이전 08화 오늘은 어디 갈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