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녕 Mar 26. 2023

같나요, 닮았나요

from 서울. 닮음

 거울 앞, 유전자의 위대함을 절실히 깨닫곤 합니다. 감수성 충만하던 10대를 거쳐 20대 초반까지, 그 속에 얼굴을 참 많이도 비춰 봤네요. 좋은 것보단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을 붙잡고 늘어졌던 시절. 내쉬어진 한숨은 결국 부모님을 향해 갑니다. 미처 가져오지 못한 우월 유전자를 탐내며, 부질없이 놓치고 나온 것에 대해 아쉬워하곤 했죠. ‘얼굴형은 엄마를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피부는 아빠가 좋은데 말이야.’ 손에 잡히지 않은 것이 가장 간절하다 했던가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두고 꽤 오랫동안 속앓이를 했었습니다. 공급책은 두 곳. 공급원의 조건이 같다면 미련도 없으련만 둘 중 한쪽이 나아 보이는 순간, 왜 저걸 닮지 못했나 마치 내 것을 빼앗긴 사람처럼 아쉬워했어요. 아주 희박한 행운으로 모든 항목이 우성인자를 갖고 태어났다면 완벽에 가깝지 않았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해봤고요. 욕심은 같은 공급원에서 탄생한 혈육을 지켜보다 사라졌습니다. 경력을 무시 못 하잖아요, 첫 작품보단 마지막 작품이 낫지 않나 여겨요. 미안해요. 오라버니.      


 모든 건 유전자로 결정된다는 말을 많이들 해요. 부모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모든 근간을 그들로부터 받아 성장합니다. 빠르게 나타나기도 하고, 뒤늦게 발현되기도 하죠. 외모뿐 아니라 성격, 사소한 습관까지 어느새 부모를 닮아가는 모습에서 그들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들 ‘아, 저들은 틀림없이 피를 나눈 관계구나.’ 느낌이 오는 경우도 왕왕 있죠. 저도 자라오며 빈번히 느꼈어요. 외모도 외모지만, 남들보다 두 배 빠른 급한 성미는 아빠에게서, 은근히 남을 웃기고 싶은 기질은 엄마에게서 한 치 오차 없이 대물림된 거란 걸 알아차릴 수 있었죠. 알게 모르게 인생 전반에 두 공급책이 막대한 영향력을 뿜어내고 계심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우린 붕어빵처럼 같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으니까요. 


우릴 닮은 아이.

    

 며칠 전부터 지우가 제 책상을 탐색하며 놀고 있어요. 입에 넣어 빨아대기 바쁘던 색연필을 바로 잡고 종이 위에 선을 긋고 점을 찍네요. 지우를 바라보는 제 눈에 가득 찬 이 감정, 혹시 ‘기대’라는 건가요? ‘설마, 나 닮아 그림에 소질 있는 거 아니야?’ 미대 출신 양육자의 설레발이 요란스럽습니다. 아이에게서 나와 배우자의 모습을 확인할 때면 때론 놀랍기도, 한편으로는 묘한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역시 내 자식이구나, 제대로 종족 번식이 되었구나 본능이 충족됨을 느끼며 매우 흡족하기도 하죠. 부모를 통해 태어났대도 결국 독립된 개체인데, 철없는 양육자들은 아이 모습에서 자신을 닮은 모습만 찾아내기 바빠요. 꼭 좋은 부분에서만 집어내려 애를 쓰죠. 자연히 주장이 엇갈릴 때가 많습니다. 아이가 기특한 모습을 보일 때가 더욱더 그렇죠. ‘날 닮았다.’ ‘아니, 날 닮았다.’ 굽힘 없는 팽팽한 싸움이 시작돼요. 결국, 둘 중 하나이거나 반반일 텐데, 생색내기들의 부질없는 논쟁은 끝을 모르고 자꾸만 반복됩니다. 지우의 성장이 대견하고 신기해 나의 유전자가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됐길 바라는 욕심이 커지나 봐요. 우리를 닮은 모습에서 어느 날엔 감탄하고 또 다른 날엔 감동도 받습니다. 책장 속 책을 골라내는 통통한 손마디를 보며, 간식으로 고구마를 즐기는 참새 같은 입술을 바라보며 아이 일상에 투영된 자신을 느끼며 흐뭇해해요. 음악이 나오면 엉덩이부터 흔들어대는 흥 많은 구석은 양쪽 모두를 닮았을 테고, 벌써 부슬거리는 머릿결은 지독한 곱슬머리인 배우자의 유전자가 승리했나 봅니다. 아기의 모든 모습에서 끈질기게 자신의 흔적을 찾으려는 노력, 어째 좀 유치하기도 하죠?    

 

 출처를 숨기는 일도 있어요. 지우가 숨이 넘어갈 듯 울음을 터뜨릴 때면, 아무도 모르게 혼자 몹시 민망해졌죠. 순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녀석이지만 배가 고파 오면 앞뒤 재지 않고 마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어요. 경험 많은 산후 도우미 선생님을 당황하게 할 만큼 지우의 울음소리는 컸고, 급작스러웠답니다. 자라오며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던 저의 어린 시절이 지우의 모습과 겹치며 괜히 어딘가가 콕콕 찔리기 시작합니다. 뭔가 성에 차지 않으면 자지러지며 울어대는 통에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엄마, 아빠까지, 다섯 모두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목 놓아 우는 절 안고 흔들어야 했대요. 바닥에 놓기만 하면 고함을 질러댔다나요. 목청은 또 얼마나 큰지, 온 집안이 떠날 듯 밤낮없이 울어대 꽤 동네 창피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 부모님의 일관된 증언에, 과장은 없는 기억이구나 뒤늦게나마 미안한 마음은 들지만 어찌할 도리는 없잖아요. 지우가 그리 울어댈 때마다 ‘나를 닮았구나.’ 나직이 읊조리며 옛 노고를 갚는다 생각했어요. 부모님을 괴롭힌 시간을 되돌려 받는 거라 홀로 반성하면서 말이죠. 좋은 것만 닮았으면 했는데, 닮지 않았으면 했던 부분이 표출되는 순간엔 참 멋쩍어요.      


 지우를 낳고서 누굴 닮았냐는 질문을 참 많이도 들어요. 지우를 동그란 뱃속에 품고 다녔을 때, 한 번씩 상상해 보곤 했죠. 어떻게 생겼을까보다, 누굴 닮았을까를 궁금해했던 것 같아요. 뚜렷하게 그려지진 않았지만, 배우자와 제 모습이 완벽하게 배합되어 극상의 조화를 만들어내진 않을까, 우리 모습 중 어디에도 없는 반듯한 구석을 아주 우연히 가지고 태어나진 않을까 엉뚱한 기대도 해봤습니다. 실제 눈으로 확인한 지우 모습은 고대로 마냥 귀엽기만 하네요. 주변에선 누굴 닮았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 눈엔 부모보다 월등히 보기 좋으니 우릴 닮았다기보단 지우 모습 자체로 보기 좋다 말하고 싶어요. 굳이 찾아본다면, 못난 곳이 하나 없으니 바람대로 장점만 가지고 태어났는지도 모르죠.      


어릴 적 제 사진과 비교해 봤어요. 어때요? 닮았나요?


 사랑스러운 지우를 눈앞에 두고, 자꾸만 걸리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자신하지 못하는 부분, 바로 건강이에요. 지우를 갖고 큰 탈 없이 달 수를 채워가던 중, 태아보험 가입을 희망했던 보험사로부터 거부 의사를 듣게 됩니다. 암이었던 제 병력이 문제였던 거죠. 이미 수술을 받은 지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어떤 날엔 잊고 지내기까지 했던 건강 문제가 현재 아이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 굉장한 좌절감을 맛봤습니다. 온종일 눈물이 멈추질 않더라고요. 나쁜 생각은 자꾸만 꼬리를 물어, 혹 내가 가진 병이 훗날 아이에게 물림 되는 건 아닐까 염려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배 속 아이는 되돌릴 수도 없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 자책도 했죠. 혹여 아이가 아프다면 모두 나로부터 기인한 것만 같아 몹시 괴로울 것 같아요. 그런 연유로 지우의 건강이 가장 큰 소망이 되어버렸습니다. 여느 양육자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유독 아이의 건강 문제만은 간절합니다. 부디 아픈 곳 없이 건강하게 자라길 바라게 되죠.   

  

 아직 지우의 성격이나 기질은 분명하질 않아요. 잠든 녀석 곁에서 여러 번 바라곤 했었습니다. 아이의 성질이 단단해지기 전, 지금이라도 나의 좋지 못한 부분은 모두 지우를 비껴가라 부탁합니다. 만사 예민한 데다 스스로 몰아치느라 진이 빠지는 전, 배우자의 여유로움이 부러울 때가 많아요. 지나친 걱정과 불안에 쫓기는 가쁜 숨에 여유를 불어넣어주는 느긋한 성격. 힘에 부쳐 때론 아이 앞에서까지 감정 조절이 힘들 때도, 특유의 평온함으로 긴장된 분위기를 단번에 정리해 주는 사람. 답답하다 힐난할 때도 있지만 실은 가지지 못한 그 마음의 넓이가 탐이 납니다. 꿈틀거리는 태동이 느껴질 때면 아이에게 속삭였어요. ‘아빠 성격을 따르렴. 엄마의 못된 성질은 모른 체해도 좋아.’ 지우는 제 이야길 기억할까요? 하루가 유달리 고달프고 힘에 겨울 때면 더욱 간곡해집니다. 거친 하루의 원인이 모난 제 성미 같아서 바라건대 태어날 아이만은 요철 없이 보드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매사에 신경이 곤두서는 엄마의 성질은 제발 벗어나길 간청할 수밖에 없어요. 이런 모습은 더하고, 저런 점은 빼고 마음대로 될리는 없지만, 최대한 좋은 점만 가져가길 바라는 욕심은 모든 양육자의 바람 아닐까요?      


 지우와 저, 우린 서로를 닮았어요. 지우도 자라 부모님의 구석이 보인다는 말을 듣게 되겠죠. 전 누가 봐도 아빠를 빼다 닮았으나, 사실 그 말을 좋아하며 자라진 않았어요. 짓궂은 엄마가 질리도록 놀려댄 탓도 있지만, 스스로 아빠를 친근하게 느끼지 못했던 사실도 영향을 줬죠. 훗날 지우가 저와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기쁘게 받아들이며 감사할 수 있을까요? 타고나길 닮지 않더라도 자연히 보고 익혀 배울 수 있도록 지우에게 보탬이 될 만한 습관과 기분 좋은 감정을 알려주고 싶어요. 지우는 저처럼 부모를 닮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편한 감정을 갖지 않았으면 합니다. 약점은 흘려보내고, 강점만 전달할 방법 어디 없을까요? 스스로 부족함을 알기에, 아이만은 자신에게 만족한 단단한 삶을 살길 진심으로 바라게 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지우가 제가 남긴 이 수많은 기우의 글귀를 보며 ‘엄마는 참 별 걱정을 다 하고 살았네.’라며 무던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이전 09화 오랜 보금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