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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녕 Apr 02. 2023

예비 여행자

from 서울. 여행

 배우자는 바빠요. 달력 속 빨간 날이 되어도 웬만해선 쉬는 날이 없죠. 주 6일을 일하고, 설, 추석 그리고 여름휴가 명목으로 받는 하루가 고작 일 년 중 쉬는 날의 전부입니다. 지우가 태어나기 전까진 크게 불만은 없었어요. 워낙 혼자 잘 있는 데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아 오래 얼굴을 보진 못해도 일주일 중 하루 정도 종일을 함께 보내는 데 만족하곤 했었습니다. 하나, 바쁜 배우자는 육아 중엔 환영받지 못합니다. 일에 매진해야 하는 만큼 아이에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물리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어요. 어디라도 가볼라치면 조정 불가한 일정 덕에 포기할 때도 많죠. 하루하루 지우의 생활 반경이 넓어지기 시작하며, 저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이제 지우는 가고픈 방향을 명확히 표하는 아이가 되었고, 이유식을 떼고 밍밍한 일반식을 시작했어요. 덕분에 집을 나서며 꾸렸던 짐은 일전보다 반 이상이 줄었고, 행여 밥시간이 되어도 분유나 이유식을 데우기 위해 급히 수유실이나 유아 휴게실을 찾는 일이 더는 없게 되었습니다. 양육자의 기저귀 가는 실력도 늘어 밖에서 큰일을 봐도 당황하거나 허둥대지도 않게 되었죠. 고로, 이젠 제법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어엿한 아이가 된 겁니다. 더는 배우자가 쉬는 일요일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었어요.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손을 흔들며 ‘안녕’에 재미를 붙인 지우를 새로운 날로 데려가고픈 소망, 실은 잠시나마 일상을 전환하고픈 제 바람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도 몰라요. 생생하고 산뜻한 시간을 바라며, 자꾸만 어디론가 가보고 싶다는 바람이 막연히 가슴 한구석에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전 겁이 많은 편이에요. 가진 겁의 실체는 대부분 새로운 장소를 찾을 때 느끼는 불안에 가장 근접해 있습니다. 더 깊숙이 파고들자면, 이 불안은 모든 걸 계획대로 하고픈 욕구 때문에 일어나요. 처음 접한 장소는 미리 작정할 수 없으니, 몸이며 마음이 편치 않아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거죠. 낯선 곳을 방문할 때면,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를 왕복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러 방편의 이동 수단을 검색해 두고, 웹을 통해 미리 목적지와 주변 장소 실제 거리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죠. 미리 파악할 수 있는 영역까진 모두 조사를 해 보는 겁니다. 익지 않은 곳,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커서 생경한 장소에서 위협적인 사람을 만난다거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 하루가 고단해지는 이상한 결말을 떠올리기도 해요. 그 때문에 어딘가 새로운 곳을 홀로 가보는 건 엄청난 힘과 긴장을 수반하는 일이 되었어요. 그런데도 새로운 경험에는 늘 목마른 사람이었기에, 가진 성향과는 정반대인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 나름의 생존 방 안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에게 힘입어 작은 지도를 개척하며 지내온 거죠. 처음 떠난 해외여행도, 고향과 학교 주변을 떠난 여행지도 모두 새로운 땅에 거부감이 없는 친구들 덕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길게 갈 것도 없이 서울 땅 안에서도 초면인 동네를 찾을 일이 생기면 굳이 그곳에 갈 일이 있거나, 목적지를 잘 아는 지인을 찾아보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으니까요. 조용히 혼자 살아가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 어째 초행길만은 단독으로 가기가 참 어려워요. 애써 해 보려 해도 가슴이 두근거려 정말 부득이한 이유가 아니라면 방문을 포기하는 때도 꽤 많았답니다. 막상 발을 디뎌보면 별반 특이한 점이 없는 곳임에도 여전히 약속 장소가 한번 가본 적 없는 지점으로 잡힐 때면 며칠 전부터 마음이 뒤숭숭해 자꾸만 휴대전화 속 지도 앱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지우의 양육자가 된 뒤, 타인에게 의존했던 제게 그 역할이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이젠 제가 주도적으로 지우를 데리고 생소한 장소를 찾아야 해요. 더는 겁만 내고 있을 수도 없죠. 외출을 포기하기도 어려웠고요. 오고 가는 길과 소요 시간을 알아보고, 목적지를 온전히 즐기는 유용한 방법을 찾습니다. 혼자서도 떨리는 발걸음에 요 자그만 녀석까지 보태졌어요. 그간 제게 베풀어준 친구들의 넓디넓은 아량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끌고 가는 입장으로 누군가와 함께 새로운 목적지에 간다는 건 아주 부담스러운 일이더라고요.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 시간이 혼자일 때보다 서너 배는 길어지네요. 보다 공을 들여야 하거든요. 지우는 서툰 저를 탓할 일은 없지만, 최대한 편안하고 울음 터지는 짜증 없이 모시고 싶은 게 소박한 안내자의 심경입니다. 초반엔 자신이 없어 양육 중인 지인과 약속을 잡아야 발길이 떨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언제까지 타인에게 의존할 수만은 없었기에 굳게 마음을 먹었어요. 그런데도 덜컥 먼 길은 자신이 없어 자동차로 10분 거리에서 갈 곳을 찾고, 다음은 20분, 30분. 점차 반경을 넓혀 나갔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지금은 무리 없이 3-40분 거리까지는 해볼 만해요. 연거푸 나름의 장거리 외출에 성공하자 좀 더 멀리 가도 되겠다 배짱까지 생겨납니다. 점점 입었던 외투가 얇아지던 5월의 화요일, 불어난 배짱은 용기로 거듭나 드디어 지우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을 계획하게 됩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질 않는 거죠? 바람은 원대했으나 13개월 아이와 향하는 목적지는 부산, 고향 집으로 정해졌습니다. 물빛 맑은 제주도,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강원도를 꿈꿨으나 막상 발이 떨어지지 않음은 여전히 용기가 부족하다는 증거일 거예요. 부산은 지우에겐 새로울지 모르나 20년을 산 저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장소죠. 결국, 온전히 참신한 장소로는 향하지 못한 채, 누구 한 명에게라도 신선하면 된다는 합리화로 사뭇 용감하지 못했던 마음을 감춰봅니다. 일주일의 긴 여정을 잡고 지우와 함께 탈 기차를 예매했습니다. 혼자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면서요. 기차표 취소가 언제까지 가능한지 몇 번이나 확인했고, 혹 안 되겠다 싶으면 얼른 취소하자 반쯤은 포기한 상태로 짐을 꾸렸어요. 일주일 동안 쓸 기저귀를 택배로 보내고, 잠깐 쓸 유모차까지 대여 완료. 짐이 줄었다 해도, 혼자 지우를 데리고 아이 짐을 모두 가져가기는 불가능하다 판단이 들더라고요. 여차여차 준비를 마쳤으나, 출발 당일 아침까지도 이게 맞는 걸까 고민이 됐어요. 지난 명절, 돌도 안된 지우 자리까지 매표해 두고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내내 배우자와 객실 사이 통로에서 울며 소리치는 녀석을 달랜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가더라고요. 최소한의 대응책으로 여러 봉지의 아기 과자와 물, 우유, 치즈, 흔들면 음악이 나오는 작은 장난감 하나를 챙겨 기차에 올랐습니다. 정작 기차를 탄 지우는 낮잠이 들었고, 눈을 뜬 뒤에도 창밖과 객실 사람들을 구경하며 여유롭게 자리를 지키더라고요. 옆자리 어르신이 아이가 참 순하다 칭찬하실 정도로 말이죠.     


 이번 부산 여행의 목표는 ‘매일 다른 날’로 정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하루도 빠짐없이 지우와 밖으로 나갔어요. 공원, 미술관, 도서관, 수영장, 놀이터, 친구 집으로 아이를 데리고 다녔죠. 태어나 오래 살았던 장소라 겁 없이 둘이 다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출발했다면 어디 한 곳만 가려해도 며칠간의 고심이 필요했을 거예요. 지리 자체가 친근하기도 했지만, 여차하면 도움을 줄 가족과 친구들이 있어 더 자신이 붙더라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는 무조건 나서고 봤습니다. 들락날락, 며칠 밤을 자고 나니 지우도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자며 현관에 앉아 신발을 집어 들어요. 바뀐 생활에 재미를 느끼는 듯 보였어요. 서울 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끌벅적함 속에 꽤 잘 어울려 지냅니다. 저도 혼자 아이를 돌보던 환경에서 벗어나, 당장 누구라도 와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을 덜고 지우와 신나게 노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 중 이틀은 지우와 바닷가 근처 숙소를 잡고 꽤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꿈도 못 꿀 일이라 여겼는데, 손이 부족해 사진은 남기지 못했지만 둘이서 간 수영장은 손에 꼽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죠.    


 

 지우는 부산에서 처음 해 본 일이 많아요. 물론 저도 지우와는 모두 처음이었죠. 우리는 토요일 아침 부산의 상징, 해운대 바닷가에 갔어요. 이른 더위의 5월임에도 바다에 발을 담그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일찍 도착한 해변에서 혹, 무서워하진 않을까 지우의 표정을 살폈어요. 쏟아지는 햇살에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던 지우는 제 손을 끌고 한 걸음 한 걸음 파도가 치고 있는 해변으로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호기심은 많은 녀석이에요. 뒤처리가 복잡한 탓에 바닷물에 발을 담글까 고민하던 제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 지우의 작은 발은 이미 파도 거품을 머금고 있습니다. 짧은 다리가 곧 물에 잠기고 처음엔 녀석도 놀랐는지 힘을 주어 제 손을 당겨댑니다. 쉬지 않고 계속 다가오는 파도가 신기한지, 지우는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그 모습에 저도 신발을 벗고 과감히 발을 담가버렸죠. 바다에 눈을 떼지 못하는 지우가 참 아름다웠어요. 눈앞에 펼쳐진 끝없는 푸른빛이 무엇인지 알까요? 그늘 하나 없는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참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다시 한번 잘 왔다 싶었어요.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바다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여행 중 지우와 손잡고 간 바닷가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지우도 행복해 보였고, 저도 그 모습을 눈과 가슴속에 담으며 모래사장과 파도를 담뿍 즐겼습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이 작은 동행자와 길고 짧은 여정을 함께 해야겠죠? 하루 외출과는 확실히 달랐던 며칠간의 시간을 통해 느낀 점이 참 많습니다. 역시 뭐든 해 보는 게 도움이 되네요. 새로운 환경은 지우와 저 모두의 일상을 환기시켰고, 지우는 생각보다 적응을 잘하고 잘 견뎌주는 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경에서 생활하던 우리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먼 도시로 나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면을 마주한 경험은 둘 모두에게 득이 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지우가 괜찮은 여행 파트너란 사실은 저에게도 몹시 큰 희망을 안겨주었고요. 계절이 바뀌거나 기념할만한 특별한 날이 다가올 때 우린 짧은 여행을 계획해 볼 수도 있을 거예요. 이젠 좀 더 자신 있는 길잡이 역할도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걱정 많고 겁도 많은 양육자는 아이 덕에 용기 쌓을 기회를 자꾸만 만나게 됩니다. 저와 정반대, 새로운 장소를 주저하기는커녕 호기심에 흥미가 가득한 요 녀석. 어쩌면 누구보다 괜찮은 여행 짝꿍이 아닐까 싶어요. 언젠가 지우와 저 모두에게 낯선 장소로 떠나, 아는 이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여정을 오롯이 둘이 결정하며 나아갈 때가 올 수도 있겠죠? 그날을 위해 보다 더 씩씩한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오늘 같은 시도가 계속된다면 그리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가을이 오면, 예쁜 단풍을 볼 수 있는 빨갛고 노란 풍경 속으로 지우와 손잡고 떠나보고 싶네요.




영국 이야기는 @mylittlecab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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