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써 보는 일기에 대한 일기
일기를 꾸준히 써 온 편이다. 규칙적인 습관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성실히 쓰지는 못했고, 다만 '일기장'이라고 하는 노트 한 권이 늘 책상 한 켠에 꽂혀 있는 정도랄까. 바쁜 시기에는 日기가 아닌 月기라고 해야 할 정도로 뜸하게 썼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를 돌아보고 손글씨를 쓰는 시간을 가져온 것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일기란 숙제의 하나일 뿐이었다. 학교 선생님이 규칙적으로 검사하는 과제의 으뜸으로, 일기 쓰기는 사실 친구들 사이에서 그다지 환영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나 역시 방학 때 노느라 정신없다가 며칠씩 밀린 일기를 쓸 때면 특히 날씨를 떠올리느라, 때로는 지난 일을 굳이 다 써야 하나 라는 의문으로 억지로 일기장을 붙들었던 기억이 있다.
'검사'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리라. 선생님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확인할 게 뻔한 일기장이란 일종의 보고서에 다름없었다. 게다가 학교에 제출하기 전에 엄마로부터 '사전 검열'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기장이란 일종의 잘 보이기 위한 기록과도 같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유년 시절의 일기장이란 SNS의 원조 격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보이고 싶은 것, 혹은 보여야만 할 것들을 기록하는 공간. 진실이 아닌 사실들도 기록하되, 최대한 진실처럼 보이도록 쓸 것.
일기 검사가 사라진 십 대 초의 어느 무렵 이후로도 그러나 나는 일기 쓰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여겨졌던 '안네의 일기'라든지 '난중일기', '백범일지'에 이르기까지 위인들이라면 자신들의 삶을 기록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여겨졌던 영향도 있을 거다. 그에 더해 습관이란 좀처럼 무시할 수 없던 법인지, 검사하는 선생님이 없다 할지라도 일기를 써야만 제.대.로. 자.라.는. 거라 믿었던 것도 같다.
기본적으로는 독백의 형태로 건조하게 서술하되 때로는 나 자신을 타이르듯, 혹은 위로하듯 썼지만 나름대로는 방식을 바꿔본 적도 있다. 부끄럽지만 사춘기 무렵에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나의 인생 소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소설 속 '제제'가 자신의 나무 '밍기뉴'에게 얘기를 하듯 나 역시 한동안은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놓고 일기장에 편지를 써 봤던 것이다.(덕분에 그때 썼던 일기장만큼은 좀처럼 다시 펴보지 않게 된다)
방식이야 어떠했든, 학창 시절의 일상이란 그다지 특별하거나 복잡하지 않았기에 일기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첫사랑을 열병처럼 앓았던 고교 시절에 이르러서야 밤늦게 흥분과 한탄의 감정을 노트 가득 토해내며 마음의 응어리를 풀었던 기억이다. 소주 한 잔은 생각도 못했던 평범하고 순진한 남고생에게 있어 축구, 농구 같은 운동은 스트레스 해소에는 그만이었으나 감성의 찌꺼기까지는 어찌할 수 없던 것이다. 여고생들끼리는 흔한 수다 떨기라든지 편지 쓰기 같은 건 아무래도 수염이 거뭇거뭇 올라오기 시작한 당시의 내게 어울릴 수는 없었다. 그 짧은 무렵의 일기야말로 이후로는 다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순수한 날 것 그대로의 기록이었다.
그러던 언제부터였을까. 일기를 쓰고 있는 나 자신과 일기장에 쓰인 나 사이에 적잖은 괴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이 노트에 '진짜' 나 자신에 대해, 나의 생각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누가 볼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 나만의 일기장인데 말이다.
표현 범위나 분량의 문제 같은 건 아니었다. 펜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므로 일기를 쓰며 드는 생각들을 손글씨로 오롯이 담아내지 못하는 게 당연함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니라 온전한 내 생각을 노트에 기록할 시도조차 하지 못한 거라면?
표현력의 부족이나 글솜씨의 미숙도 아니었다. 문장의 성숙도나 미사여구와는 상관없이 진실한 글로만 가득해야 할 일기장을 펼쳐보면 거기에는 100퍼센트 나의 진심이 드러난 것 같지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에 비해 문장은 간결해졌고 어휘는 다양해졌으나, 그 안에 담긴 진실은 확실히 부족해 보였다.
있었던 일 자체를 왜곡하지는 않았다 해도, 보다 나은 내일을 기약하는 다짐의 반복이 가끔은 공허하다 해도, 그렇게 성인이 된 후의 일기는 예전만큼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두려웠던 걸까? 엄마가 내 방 청소를 하다가 혹시나 일기장을 들출까 봐 알게 모르게 경계를 하느라 생긴 망설임? 아니면 훗날에 어떤 경로로든 타인들에게 나의 기록이 알려질까 봐 저어하는 미래에 대한 걱정? 둘 모두 전혀 근거가 없는 두려움은 아니지만 그게 다는 아닌 듯하다. 실제로 엄마가 내 방에 더 자주 들어왔던 학창 시절에 몰래 숨겨두며 썼던 일기는 더 진실했고, 잃어버리거나 유포될 걱정을 하기에는 서랍장 구석에 차곡하게 쌓인 일기장들은 지금껏 너무나 안전하게 보존돼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일기장에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현재의 나(일기를 쓰고 있는)는 과거의 나(일기에 쓰이고 있는) 보다 반드시 괜찮아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던 것 같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리고 그 내일이 모여 밝은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희망론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인 자기계발의 명제가 아니던가. 선생님에게, 혹은 엄마에게 검사를 받으며 착한 나, 올바른 나, 밝은 나여야만 했던 습관은 나도 모르게 그러한 긍정성을 스스로에게 강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이러했으므로 내일은 저러해야겠다라는 다짐만이 삶에 대한 긍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 나이인 걸까. 때로는 그저 담담하게 있었던 사실만을 기록하더라도, 또 때로는 짜증나거나 불만인 사항들을 구구절절 쓴다 하더라도 그것을 좀 더 꾸준하고 성실히 이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나의 일대기요 역사가 아닐는지.
그래서 다짐해 본다. 어차피 다시없을 첫사랑이나 존재하지 않을 완벽한 사랑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기에는 그저 현재의 사랑을 더욱 열정적으로 기록해 볼 것. 스스로에게 비록 실망을 했을 지라도, 혹은 타인에게 더는 상처받지 않기로 했을 지라도 나와 남을 떠올릴 때 드는 생각만큼은 다짐이나 판단에 앞서 남김없이 그냥 써 볼 것. 일기를 쓰면서 그려보는 내일의 나도 중요하지만, 간밤에 일기에 기록한 어제의 나야말로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실제의 나였음을 인정할 것.
사족. 나 말고도 이렇게 일기에 솔직하지 못했던 이들이 많다면, 그들은 자신에게조차 감추는 감정을 오히려 남들에게 고스란히 알리고 들키는 게 바로 일기장을 대체한 SNS 세상이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진짜 나'의 일기는 소중하겠기에, 앞으로 밤에는 되도록 노트를 자주 펴고 솔직한 시간을 가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