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슈켄트에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기쁨에 티켓을 예매하고 손꼽아 기다리던 발레 '지젤'을 보는 날이었다. 몰입하고 보고 싶은 마음에 맨 앞 정중앙에 자리 잡고 숨죽이고 보고 있었다.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가장 앞자리에 있다 보니 1막 내내 어딘가 아슬아슬 불안해 보였다.
2막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녀 주연들이 아주 심하게 넘어지고야 말았다. 십여 년간 세계 곳곳에서 발레와 오페라를 보았지만 이렇게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발레는 처음이었다.
'알리쉐르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l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 공연들
"좋아하는 일이 뭐예요?"
누군가가 물어보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여행과 공연 그리고 전시 관람이요!"
스무 살이 되면서 시작된 나의 여행과 공연, 전시회를 다니는 것은 취미를 넘어 일상이 되었고 이제는 내 삶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우연히 첫 해외여행을 가게 되면서 그 맛을 알아버린 나는 수십 년이 지난 꽤 오랜 시간을 여행이 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다녔다. 일 년에 열 번 혹은 열두 번을 다니기도 했으니 매달 해외여행을 간 셈이다. 어떻게 가능하냐고 할 수 있지만 긴 시간이 안 나면 1박 2일, 2박 3일 가까운 곳을 가볍게 다니기도 했다.
십오 년 전 즈음, 지인 중에 김포공항 근처에 살면서 일본 라면이 먹고 싶으면 주말에 잠깐 다녀온다는 분이 있었는데 그때는 '농담도 참 재미없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내가 그러고 있었다. 요즘은 나의 여행 이야기를 글로 풀어 볼까 혹은 이것을 바탕으로 여행 관련 사업을 해볼까 하는 고민을 가볍게 해 본다. 여행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풀고 오늘은 공연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의 공연의 첫 입문은 연극이었다.
학창 시절 우연히 공짜 티켓이 생겨 가게 된 대학로의 아주 작은 소극장은 신발도 벗고 들어가는 곳이었으며, 단차 없이 오밀조밀 모여 앉아 보는 공연장이었다. 쾌쾌한 냄새와 사람들의 묘한 체취가 뒤섞여 본 첫 연극은 무대라고 할 것 없는 객석과 구분이 안 되는 좁은 공간이었고 당시 내 기준에는 과한 노출과 스킨십이 있어 살짝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후, '햄릿', '에쿠우스' 등의 연극을 보게 되면서 작품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너무 즐거워 연극에 푹 빠져들게 되었다. 연극으로 시작된 나의 공연 관람 취미는 뮤지컬, 발레, 오페라, 콘서트로 확장되었고 한 달 서너 번을 다닐 만큼 전투적이었다.
우즈베크로 오기 전에 즐겼던 공연은 덕질하는 가수의 콘서트와 발레, 오페라를 주로 다녔고 틈틈이 미술관을 다니는 것이 일상의 큰 즐거움이었다. 이곳으로 오게 되면서 가장 큰 걱정은 건강에 대한 염려였고, 또 하나는 공연과 전시 관람이라는 나의 즐거움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세계 고전 작품 공연이 열리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오페라 하우스가 있다. 16세기 우즈베키스탄의 유명한 시인 알리쉐르 나보이(Alisher Navoi)의 이름을 딴 '알리쉐르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l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이 타슈켄트 중심에 위치해 있고 거의 매일 오페라와 발레가 공연된다.
'알리쉐르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l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
오페라 극장이라고 하면 흔히 유럽의 로코코나 바로크 양식의 극장을 떠올리는데 나보이 극장도 생각보다 꽤 멋지게 지어진 건축물이다. 구소련의 영향을 받은 국가이기에 발레나 오페라 수준도 생각보다 높은데 가격은 합리적이라 즐겨 찾게 된다.
이 극장은 모스크바 레닌의 묘를 설계했던 알렉세이 시추세프가 건축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패전국인 일본군 포로의 노동력으로 세웠다고 하는데 타슈켄트에 큰 지진에도 이 건축물은 건재해 지진 대피소로 이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군 포로가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까지 와서 강제 노동을 했다는 것에 묘한 쾌감과 씁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극장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현판
극장의 내부 장식은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여섯 개의 로비는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페르가나, 테르메스, 호레즘 도시들의 특징을 표현한 것이고 각각 다른 콘셉트로 건축되었다고 한다.물론 극장의 화려함이 유럽 도시의 오페라 극장에 비하면 무척 소박하지만 기대치가 낮았던 내게 타슈켄트 오페라 극장은 너무나 만족스럽다.
'알리쉐르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l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
나보이 오페라 극장의 로컬 공연 관람료는 좋은 자리는 보통 로컬 공연은 2만 원 내외이고 해외 공연인 경우는 한국 돈으로 몇십만 원을 훌쩍 넘기도 한다. 이곳에서 저렴한 만큼 아주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하고 종종 즐겨 찾는다.
롯데호텔에서 본 '알리쉐르 나보이 오페라 발레 극장(Alisher Navoi Opera and Ballet Theatre)'
나보이 오페라 극장 외에도 러시아 연극 극장, 음악당, 콘서트홀, 마리오네트 극장 등 9개가 넘는 극장이 조그마한 타슈켄트시에 밀집해 있어 문화생활을 즐기기에 부족함을 못 느낀다.
이곳에서는 심심하고 지루해지면 충동적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페라와 발레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서게 되는데 이렇게 문화생활을 경제적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