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밭에서 시작된 여름방학

여름은 늘 고단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by 시연
“방학은 복숭아밭에서 시작됐다.
땀, 벌레, 긁힌 손끝. 그게 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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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첫날이었다.
창밖은 아직 어둑했고, 이불 속 공기는 서늘했다.
나는 졸린 눈으로 벽시계를 바라보다가, 시침이 다섯을 가리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엄마…”
부엌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솥뚜껑이 덜그럭, 물 끓는 소리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엄마는 앞치마를 두르고 고구마를 찌고 있었다.

“오늘 방학인데… 나 그냥 자면 안 돼?”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는 물을 냄비에 붓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방학이라서 더 바빠. 복숭아밭 가야지.”

그 말에 나는 잠이 확 깼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친구들은 학원 시간표 짜느라 바쁠 텐데…
나의 방학은 팔토시로부터 시작됐다.

복숭아밭으로 가는 길은 짧지만 늘 멀게 느껴졌다.
흙길은 이슬에 젖어 미끄럽고, 나뭇가지에 걸려 종종 옷이 찢어졌다.
해가 막 떠오르기 전, 안개 낀 복숭아밭은 마치 꿈속처럼 고요했다.

복숭아 향이 먼저 코끝을 찔렀고,
그 뒤로 뻗어 있는 나무들마다 분홍빛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햇살이 퍼지기 전의 복숭아는 더 예뻤다.
부드러운 솜털에 물방울이 맺혀 반짝거렸고,
마치 복숭아들이 서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예쁜 건 잠깐이었다.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끝이 없었다.

손에 낫을 들고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딸 때면,
팔은 긁히고, 손끝은 아리고, 다리는 벌에 쏘이기 일쑤였다.
복숭아를 담은 바구니는 금세 무거워졌고,
아버지가 만든 낡은 바구니 손잡이는 어깨를 깊게 눌렀다.

어느 날은 나뭇잎 사이에 숨어 있던 벌에게 쏘였다.
화들짝 놀라 뛰어내리며 울먹였고, 손등이 퉁퉁 부었다.

“엄마… 아파…”
손등을 내밀자 엄마는 말없이 약을 꺼내 발라줬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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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은 해야지.
남들도 다 그렇게 커.”


그 말이 그땐 무심하게 느껴졌다.
마치 **‘참아라’**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엄마의 말에는 ‘당연함’이라는 현실과, 그럼에도 묵묵히 해낸 **‘어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는 걸.


내 또래 친구들은 방학이면 학원 두세 개씩 다니고,
물놀이도 가고, 가족끼리 캠핑도 간다고 들었다.
나는 새벽마다 복숭아밭에 갔다.
복숭아 밑에 앉아 쉬다가 몰래 하나씩 베어 물며,
언젠가 나도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는 그렇게 남들만큼만, 남들처럼만 크는 법을 배워갔다.
튀지 않게, 부족하지 않게, 민폐 끼치지 않게.
무난함이 미덕인 줄 알았던 그 시절.


여름은 늘 고단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자라고 있었다.
조용히, 묵묵히, 아주 단단하게.

그리고 그 고단했던 여름은,
훗날 서울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가장 깊은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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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예고

학원이 없던 시절, 나의 도서관은 동네 책방이었다.
책을 몰래 읽고, 문장을 적어가며 키웠던 나만의 작은 우주.
2화. 책방에서 찾은 작은 우주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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