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찾은 작은 우주

책을 몰래 읽고, 꿈을 몰래 키웠던 아이

by 시연



“갖고 싶다”는 말조차 사치였던 시절,

나는 책을 빌리지도, 사지도 못한 채
그저 책장을 넘기기만 하던 아이였다.


우리 동네에는 학원이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학원’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리 가족의 대화 속에 없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나누는 대화는 이랬다.
“이번엔 영어학원 옮겼어. 거기 쌤 진짜 잘 가르치셔.”
“너도 이번에 수학 선생 바꿨어?”
나는 그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조용히 도시락을 먹거나, 책상 위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엄마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 나도 학원 다니면 안 돼?”
엄마는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며 말했다.
“그런 건 서울 애들이나 하는 거야.
우리 집은 그런 사치 못 해.”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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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부터, 나는 동네 책방을 들락거렸다.
책방이라기보단, 작은 서점이었다.
가게 간판은 낡았고, 진열대는 낮고 빽빽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종이 냄새가 났다.
새 책 냄새와 낡은 책 냄새가 섞인, 그 특유의 향기.
그 책방에는 서점 사장님의 딸이 항상 계산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아이는 새로 들어온 책을 누구보다 먼저 읽는 사람이었다.
말없이 책을 펼치고, 아주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그 손끝이 너무 익숙해서, 나는 가끔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책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살 돈은 없었고, 빌릴 수도 없었다.
나는 구석에 조용히 서서 책 한 권을 골라 펼쳤다.
종이를 넘길 때, 사르륵 하는 소리에마저 죄책감을 느꼈다.
가끔 사장님이 눈치를 줄까 봐,
나는 정해진 몇 쪽까지만 보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머릿속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그게 내 유일한 공부였다.
책을 몰래 읽고, 문장을 몰래 적고, 꿈을 몰래 키웠다.


어느 날, 친구 하나가 새로 나온 책을 들고 와 말했다.
“이거 알아? 베스트셀러래. 우리 엄마가 바로 사주셨어.”
나는 책 제목을 외웠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책이 책방에 들어오자 가장 먼저 꺼내 들었다.
표지의 감촉, 활자의 간격, 문장의 리듬…
나는 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몰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언젠가, 책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책날개에 내 이름이 적힌 책을 서점에 진열할 수 있을까.’
그건 너무 멀고 흐릿한 꿈이었지만,
그래서 더 간절했고, 나만의 작은 비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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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그 책방이 내 첫 번째 도서관이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공간은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공호 같았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그 시간,
나는 분명 자라고 있었다.
몰래 쓴 문장 속에서,
몰래 지켜낸 마음 속에서.



다음 편 예고
도시로 가고 싶었다.
가난하다는 걸 들키지 않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치듯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공부.
3화. 도망치듯 시작한 공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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