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듯 시작한 공부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by 시연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거짓말했다.

“그냥… 책 사러 가는 거야.”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고 읍내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엔 그늘도 없고, 벤치도 없었다.
덥고 축축한 바람이 얼굴을 때리던 한여름 오후였다.

실은 서점에 가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날, 도망치고 싶었다.

논밭 사이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느리게 흔들리는 논, 풀 깎는 마을 사람들,
늘 같던 풍경인데, 그날따라 너무 낯설었다.

‘나는 여기랑 안 어울려.
여길 벗어나야 해.’

처음으로 확신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우리 마을엔 신호등이 하나,
도서관이라 해봐야 읍사무소 2층 창고 같은 방 하나.
어디에 있어도 나는 늘 “누구의 딸”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름보다 형편이 먼저 보이는 곳.

가난은 늘 들켰다.
교복 바지 한 벌로 사계절을 버티던 나,
급식비가 밀려 교무실에 조용히 불려가던 날.
친구들은 아무 말 안 했지만, 그 침묵이 더 아팠다.

그래서 도시로 가고 싶었다.
서울은 다들 바쁘고, 서로를 모른다 했다.
그건 나에겐 너무나 간절한, 익명이라는 자유였다.


“야, 너 왜 그렇게까지 공부하냐? 서울대라도 갈 거야?”

어느 날 친구가 툭 던졌다.
나는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갈 거야. 아니, 가야 해.”

그건 허세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었다.
내게는 그게 유일한 탈출구였으니까.


전기장판이 고장 나서, 겨울마다 발 시린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제집을 풀었다.
형광등 하나 켜놓고, 손끝이 얼어가며,
볼펜이 없어서 연필로 쓰고 지운 연습장 위에
구구단을 외우고 영단어를 베껴썼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한 공부가 아니었다.
살기 위한 공부.
들키지 않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 합격했다.
입학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


기쁨보다 두려움이 먼저 찾아왔다

‘등록금은 어떻게 내지?’
‘서울 월세는 얼마나 할까?’
‘내가… 정말 그곳에 가도 될까?’

꿈꾸던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너무 많은 현실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도망치듯 공부했고,
도망치듯 도시로 향했다.
하지만 그 도시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낯설고 차가운 곳이었다.


다음 화 예고

합격의 기쁨도 잠시,
가장 친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내 곁을 떠났다.
빛나는 순간에 찾아온 고독과 질투,
그리고 외면당한 열여덟의 겨울.
[4화. 질투를 마주한 열여덟의 겨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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