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달리고 싶은 그런 날이 있었다.

느린 러너, 나만의 리듬으로 산다는 것

by 시연

어릴 적, 나는 달리기를 싫어했다.

달리면 늘 꼴찌였고,

운동장이 끝나갈수록 내 숨소리만 커졌다.


모래 먼지가 일고,

아이들의 함성이 멀어질 때면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도장을 받지 못한 손등을 숨기고

줄 끝에 서 있던 그 순간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느림’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빠른 게 잘하는 거고,

느린 건 부족한 거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지치게 한 건 ‘느림’이 아니라 ‘비교’였다.
남들보다 늦게 가는 게 아니라,
나만의 속도를 몰랐던 것이다.







남편은 3년 전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밤마다 이어폰을 끼고,

가로등 불빛을 따라 뛰었다.


“같이 할래?”

그의 물음에 나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걷는 게 좋아.”


세상은 이미 충분히 빠르다고 생각했다.

매일 뭔가에 쫓기듯 살면서,

나에게조차 ‘쉬어도 된다’는 말을

한 번도 해주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면

내 마음조차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꺼냈다.

가장 싫어했던 달리기.


처음엔 1분이 너무 길었다.

1분을 달리고 3분을 걸었다.

2분, 3분, 4분… 시간을 조금씩 늘렸다.

그러다 4분에서 5분으로 넘어갈 때,

몸이 무겁고 숨이 막혀 멈추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5분의 벽을 넘자,

세상이 달라졌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열리고,

심장은 두려움 대신 리듬을 찾았다.


아무 일도 달라진 게 없는데,

내 호흡이 바뀌자 세상이 달라졌다.





그때 깨달았다.

인생에도 그런 벽이 있다는 걸.

가장 포기하고 싶은 순간,

그 5분만 더 견디면

그 너머엔 언제나 새로운 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렇다.
그만두고 싶은 찰나,
단 1분만 더 버티면
마음의 풍경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오늘 나는 평소보다 느렸다.

수많은 러너가 나를 앞질러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내 속도를 안다.

내가 무너질 지점을 알고,

내가 견딜 수 있는 리듬을 안다.


예전엔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지금은 안다.

내 속도로 사는 게 나를 지키는 일이라는 걸.


어제보다 느릴 수 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느림은 실패가 아니라,

지속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





이제는 기록을 재지 않는다.

몇 초, 몇 등, 그게 무슨 상관이랴.

나는 나의 길을 달린다.


밤의 공기 속을,

가로등 불빛 아래,

내 그림자와 나란히.


그저 달릴 뿐이다.

살고 싶어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완벽하게 잘 달리고 싶은 마음보다

오늘도 내 자리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느리게 달려도 괜찮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언제나 완주다.




느리지만 달리고 싶은 그런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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