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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참, 곱다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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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미 Jan 25. 2023

선죽교를 놓쳤어

꿈에서도 놓친 길

오랜만에 타는 기차여선가 철그덕 철그덕 달리는 소리가 연가처럼 들린다. 창밖의 평야와 강은 라로이드 감성으로 눈동자에 맺힌다. 은 서슬 퍼런 냉기로 살벌하지만 안은 들이치는 햇살 따사롭기만 다. 종착역에 가까워지니 속도가 느려진다. 선반에 올린 가방을 꺼내 내릴 채비를 한다.


용산역에 들어선 열차가 멈추질 않는다.   말 듯 어린 손주 애간장 태우는 할아버지의 장난기 어린 롤리팝처럼  하다 다시 간다. 서서히 역을 지나치더니 속도를 높인다. 격렬하진 않지만 착할 기세는 분명 아니다. 풍경이 맺혔던 눈동자들이 놀라 두리번거린다. 어떤 안내 방송도 없이 기차는 철그더억 철그더억 가던 길을 간다.


그때 반대편 선로를 따라 기차 한 대가 천천지나간다. 낯선 듯도 하고 익숙한 듯도 하다. 사랑의 불시착 리정혁 대위의 복장을 한 군인들이 타고 있다. 민간인들도 다문다문 보인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미소 띄며  흔든다. 무슨 상황인가 얼떨떨한 찰나 느닷없이 여러 명의 북한군이 우리 기차에 올라 선로 전환기고장나서 어쩔 수 없이 북으로 이동하는 중이라전한다.

한으로?

놀란 승객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철도 관제소는 뭘 하느라 이런 사달을 만들었냐부터 수동으로라도 전환하면 되지 않냐, 언제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냐, 도착지가 개성이냐 평양이냐, 별도의 관광이 가능하냐는 철없는 질문까지 기차 안은 아수라장이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군인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기차는 말없이 북쪽을 향해 간다.


납치일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대다수의 무리들은 적당한 장소에서 탈출하자고 선동한다. 달아나지 못하면 아오지로 갈 수도 있다고 겁준다. 북한을 여행할 수 있게 됐다고 들썩이는 몇몇  큰 사람들은 마냥 들떴지만 겁쟁이 나는 탈출의 무리에 마음을 섞는다. 


어디쯤일까?

창밖을 내다보니 익숙한 풍경이다. 언젠가 와봤던 도라산역이다. 느린 이동이었는데 어느 새 도라산역이라니. 뭔가에 홀린 기분이다. 이곳을 넘어가면 말로만 듣던 개성이고 평양이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수백 명이 우르르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결에 나도 합류한다. 출입문이 쉽게 열린 걸 보면 선택의 기회를 준 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고 조심하란다. 이곳은 아직 남쪽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들이 더 많다. 발자국 소리들이 신경쓰이지만 아직은 무사하다.


겨울인데 땀이 촉촉하다. 무릎에선 열이 나는 것 같다. 제법 먼 곳까지 달려온 느낌이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용산 역사가 가깝다고 힘내라는 소리가 들린다. 왠지모를 희망이 차오른다.


그때다.

"이번에 정차할 곳은 우리 열차의 마지막 역인 용산, 용산역입니다. 잊으신 물건 없이 안녕히 가십시오."


어라, 기차가 다시 용산역이라고? 

나 여기까지 지치도록 달려왔거늘.

개성이나 평양까지 갔던 사람들이 무사히 돌아온 거라고?

난장맞을! 선택을 잘못했네.

끝까지 타고 가서 《하여가이방원》 vs 단심가정몽주 담판 결렬이름난 선죽교라도 보올 걸 그랬어.




누군가 어깨를 흔들며 다왔단다. 기진하여 눈 뜰 힘조차 없다. 무릎시큰것 같다. 


아쉽다

뭐가?

선죽교

선죽교?


꿈에서조차 나는 가고 싶은 길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추기는 안전한 길로 들어섰다. 가고 싶은 길을 따라가 보고 싶었던 선죽교 앞에  수 있었건만 겁먹은 채 도전과 선택을 소홀히 다루는 바람에 특별기회를 놓치고 다. 

현실에서도 놓쳐버린 시간은  즉시 소멸돼 회복 불능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릎은 이미 낡아 댄스를 배울 수 없었다. 아쉬움에 갇히지 않으려면 자주 들여다보고 점검할 수 있도록 당신은 손목시계처럼 오늘을 차고 다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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