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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Sep 20. 2021

코로나 덕에 명절을 가뿐하게

#1 그 집 큰 아들 참 센스 있네.

지난주 토요일, 오랜만에 동기를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둘 다 아들만 2인데, 이제 들어갈까 하던 참에 동기 큰 아들한테 문자가 왔다.

"엄마, 고모네 왔어. 늦게 들어와."

동기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명절이라 고모네가 놀러 온 것이다.


"큰 아들 참 센스 있네."

내심 다 키웠다 싶었다.

엄마가 고모네 챙기랴 힘들까 봐 오지 말라 문자를 보내주는 센스.

- 아무리 시어머니랑 같이 산다지만, 남편 형제들이 사전에 연락도 안 하고 온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진 않았다.

가족이니까 연락도 없이 와도 되는 건가?

나는 부모라도 연락 없이 오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

사실 결혼하고 시댁에서 뜬금없이 찾아와서 놀란 적이 있었다.

한 번은 퇴근 전이라 어긋났고 - 저녁 7시 좀 넘어서였는데, 왜 여태 퇴근을 안했냐는 목소리에서 떨떠름함을 느꼈다. 6시 퇴근하면 빨리와도 7시는 넘는데 말이다.

한 번은 밖에 있다가 오셨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왔었다.

집안 꼴이 억망일 것 같아서 어찌나 초조했던지.


#2 아이들도 다 안다.

큰 아이가 어렸을 때였는데,

"엄마는 왜 OO(지역 이름) 할머니를 싫어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친가와 외가를 지역 이름을 앞에 붙여 구분을 했는데, OO할머니는 친할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심 뜨끔했다.

말하지 않아도 어린아이 눈에도 보였나 보다.


아침에 잡채를 하고 동그랑땡과 두부를 부치고 나니 밥때였다.

대강 밥을 차려서 내는데, 둘째가 또 시비였다.

동그랑땡과 떡갈비는 비슷한 거 아니냐는 반찬투정에서 시작해서 형에게 OO 놈이라고 욕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성질을 버럭 냈다.


둘째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을까?

내 마음을 곰곰이 따져보니,

그렇다. 명절이라 그랬다.

심지어 두통까지 있었다.


이건 아마 죽었다 깨나도 남자들은 이해를 못할 일이다.

뭐 대단하게 한다고, 명절이면 아프고 우울한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단한 거 없다. 대단한 거 없는데 몸이 반응한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심지어 몇 년 전 명절에는 시댁이 이사하고 첫 명절이었는데, 40 평생 처음으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 새집 증후군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무딘 편이라 평상시 알레르기 비염, 아무것도 없었다.

비염을 달고 사는 남편과 큰 아이는 멀쩡했는데 나만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3 한국의 며느리

모 소설가의 에세이에서, 부모님이 결혼을 너무 반대해서, 결혼하고 아내를 데리고 친가에 가지 않는다는 글을 보았다. 물론 노력하면 그 둘의 사이도 괜찮아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3년 이상은 걸리는 프로젝트에, 여기저기 치일 생각을 하니, 아예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고.


현명한 생각이다.

만약 내가 결혼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나는 지금은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잘 몰라서, 원래 결혼이 이런가 부다 싶어서 참았지만,

나는 참지 않을 것이다.

내가 겪은 부조리함과 인격모독은 대한민국의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당연히 겪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참았으니 그래도 지금 잘 살고 있는 거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내가 참아야 하는 당위는 아니다.

부당한 건 부당한 것이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결혼하기 전에 명확하게 말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기가 아이들에게 명절에는 가끔 외식하고, 가능하면 너희 가족끼리 여행 다니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잘 돌아다니니까, 굳이 너희들 찾아오지 않아도 적적하지 않게 잘 지낼게.

일하느라 잘 쉬지도 못할 텐데, 명절이라도 쉬어라.

본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아이들에게는 가끔 밥이나 먹자고 하는 모습이 대견했다.


#4 고마운 코로나?!

타이레놀 두 알을 삼키고, 안 되겠다 싶어서 큰 아이와 산책을 나갔다.

우리 앞에는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팔짱을 끼고 걷고 있길래,

나도 큰 아이 팔짱을 껴봤다.

하늘은 파랗고 나무는 푸르고, 햇빛도 이렇게 환한데,

우울할 건 뭐냐~


게다가 이번 명절은 코로나 덕에, 전날부터 가서 자는 건 안 하지 않나?

당일 아침 점심만 먹는데 나도 오버다.

이제는 나이가 드셔서 그런 건지, 전과는 다르지 않나?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음식을 해가서 그런지, 음식 하면서 잔소리는 덜 듣는다.

사실 나는 음식을 잘하진 않지만 명절이 음식 때문에 싫은 게 아니다.

음식, 설거지, 과일 깎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다.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냥 기계적으로 하면 돼지.

다만 그 과정에서 이런 것도 못 배웠냐는 친정을 질타하는 말들과,

네가 일을 해서 아이들이 못 배웠다는 나무람,

네가 아이들 이것저것 안 해 먹여서 먹을 줄 아는 게 없다는 식의 깔 봄이 싫은 거지.


#5 팩트만 보자.

사실을 따지고 보면 귀 기울일 필요가 없는 말들이다.

요새 누가 귀한 딸자식 집에서 일을 시키나?

내가 귀하게 큰 건 아니지만, 결혼 전에 음식 배워서 오는 사람 없다.

내가 일을 해서 우리 아이들이 못 배웠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가끔 둘째가 도를 지나치긴 하지만, 그 녀석도 밖에서는 모범생이다.

이것저것 안 해먹인 건 맞지만, 아이들은 밑반찬을 안 좋아한다.

특히 야채를 버무린 종류들은 손도 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시어머니에 말에 흔들리지 말자.

그런 마음조차 네가 상대방에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왜 나를 싫어하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싫은 게 default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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