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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정 Apr 01. 2021

경력직으로 입사한 죄!

직장 생활 소고

대학졸업 전에 공채로 입사한 공차장과 경력직으로 입사한 홍차장은 동갑입니다.

홍차장은 손꼽히는 국내 대기업을 다니다 외국계로 이직한 뒤, 공차장이 다니는 공공기관으로 다시 이직을 하였습니다.

홍차장은 매사 호기심도 많고 일에 대한 열정도 넘칩니다.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자기 돈을 들여서 강의를 듣고, 관련 서적도 찾아봅니다.

반면 공차장은 안전지향주의자로, 인수인계 받은 그대로 업무를 합니다. 본인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업무를 배운 적은 한번도 없었고, 가끔 회사에서 보내주는 교육을 이수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한 회사를 오래 다녔죠.


대한민국이 아니고 외국이라면 아마도 업무능력이 뛰어난 홍차장이 더 주목을 받겠죠.

그렇지만 여기는 대한민국, 한직장에 꾸준히 오래 일한 사람이 대접받는 곳입니다.


공차장과 밥을 먹던 홍차장은 공차장의 뼈 있는 말 한마디를 듣습니다.

“이 회사는 일 잘한다고 인정하는 곳이 아니야.

회사의 히스토리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지.”


듣던 홍차장은 열이 받습니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잖아?’


그에게는 끈끈한 사내 네트워크가 있었고 공공기관의 특징 상 그러한 사내 네트워크가 정치력을 발휘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일은 하는 사람만 한다고 일을 잘하고 해본 일이 많으면 점점 더 많은 일이 주어집니다.

문제는 그렇게 일을 하고 인정을 받으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에서의 인정이란 게 급여인상이나, 승진 등인데, 급여는 둘째 치고라도, 승진은 요원합니다.

아래서 받쳐주고 위에서 땡겨주는 게 없는 홍차장은 낙동강 오리알처럼 둥둥 떠있습니다.


홍차장은 공차장이 공공연하게 차기 부장 후보로 언급되는 게 배가 아픕니다.


화려한 경력을 뒤로하고 이제는 안정적인 회사에서 오래 일할 마음으로 공공기관을 이직한 홍차장은, 본인의 잦은 이직이 조금은 후회스럽습니다.

다양한 회사와 제도를 경험하고, 실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점에서는 만족하나, 

동갑내기 차장보다 훨씬 승진에서 멀어진 지금의 자신이 빛 좋은 개살구 마냥 실속 없어 보입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운구기일로 바꿔야 한다는 게 홍차장의 생각입니다.

능력이 있지만 운이 받쳐주지 못하는 사람

본인은 특별히 하는 건 없지만 그냥 물 흐르는 듯이 같이 흘러다가 뭐 하나 걸리는 사람

이 모든 게 운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항상 그 결과가 좋은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성격이기 때문이죠.


성격이란 외부세계와 대응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철학적 색채를 입힌다면 가치관, 주관 등으로 불릴 수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기질, 체질 등이겠죠. 


타고난 성격이 매사 열심인 홍차장은 아마도 승진을 하나 하지 않나 뭐든 열심히 하겠지만, 아마도 그 방향은 이제 달라질 것 같습니다.

과거의 홍차장이 회사 일에 열심이었다면, 승진을 내려놓은 홍차장은 이제는 자신과 가족에게 열심입니다.


손자병법의 시계편에서는 ‘상벌숙명’, 즉 어느 조직이 상벌의 시행을 명확하게 운용하느냐가 조직의 성패를 가른다고 보았습니다.

상을 받을 만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면, 반대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넘어간다면, 

조직에서는 무엇이 잘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구분하는 기준도 모호해지고 굳이 잘 할려고 애쓸 이유도 없어집니다.


회사의 히스토리를 잘 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말그대로 회사의 히스토리를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이 일은 이런 연유로 이렇게 진행되었다.

원래는 이렇게 됐어야 하는데 당시 이러이러한 배경에 그리 되었다.

이런 뒷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면 다음번에 같은 종류의 일이 생길 때 참고할 수 있겠죠.

둘째, 회사의 문화를 잘 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회사는 이러이러한 경우 이렇게 행동해왔어.

그러니 너의 제안은 취지는 좋지만 그간 히스토리로 봤을 때는 힘들다고 봐.

왜냐면 우리회사는 이런 경우 대게 이렇게 결정하거든.


첫번째나 두번째나 홍차장을 배제하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니가 뭘알아? 여긴 내 홈그라운드야 이런 의미죠.


공공기관은 사람들이 잘 안 바뀌는 조직입니다. 평균 근속이 어마어마합니다.

사람들도 안 바뀌고, 열심히 해도 주어지는 보상이 없으니, 책 잡히지 않게 실수한 거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는 무사안일 주의에 물들기 쉽습니다.

좋으나 싫으나 같은 사람들과 부대끼다 보니 서로 부딪히지 않게 조심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물론 애초에 경쟁률이 높아 선별된 인력이 채용되는데다, 외부 감사를 받으니 적정 수준이 유지되기는 합니다. 

뭘 하나 하려고 해도 규정과 절차가 이렇고 저렇고, 복잡해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알아보다가 지칩니다.

그러니 좋은 취지의 제안을 한 사람도 중도에 포기하기 마련이죠.


이런 곳에서는 홍차장도 태도를 조금 바꿔야 본인 속이 편안할 것 같습니다.

회사 일은 책 안 잡힐 만큼, 욕먹지 않을 만큼, 월급에 미안하지 않을 만큼 합니다.

월급에 미안하지 않을 정도로만 해도 이미 다른 직원들 보다 열심일 겝니다.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를 자신과 가족들을 돌보는데 사용합니다.

늘 미뤄뒀던 우크렐레도 배워보고, 서핑도 도전해보는 겁니다.


회사는 홍차장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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