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뭐지?’
난 아침에 일어나서 라디오를 들으면서 출근 준비를 한다. 근데 오늘은 이상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어제 들은 내용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 같았다.
‘잘 못 틀었나? 다시 듣기를 눌렀나 보네’
요즘엔 스트리밍이 가능한 시대이기에 지나간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다. 난 항상 라디오를 앱으로 듣기 때문에 아침에 내가 잘 못 눌렀나 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급하게 출근준비를 했다. 대부분의 직장인의 아침이 그러하듯.
그렇게 준비를 하고 버스를 타고, 오늘따라 자리가 없어서 서서 가는 도중에 시계를 보고 난 조금 놀랐다.
‘7’
날짜를 가리키는 곳에 ‘7’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차고 다녀서 그리고 시계가 배터리로 움직이는 녀석이라 응당 배터리가 없나 보다라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맞는 거 같았다. 통상 배터리가 없으면 시간도 안 맞게 마련인데 말이다. 내려서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난 열심히 두리번거리면서 자리를 찾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리 만큼 자리가 나질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서 난 핸드폰을 확인하고 너무 놀라 그 자리 선체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2020년 5월 7일 Thu 09:30’
아날로그시계는 그럴 수 있지만 디지털은 그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게 단정 지어서 생각하는 버릇이 좋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살고는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는 못하다. 계속 ‘말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무실에 도착해서 랩탑을 켜고 난 바로 날짜를 확인했다.
‘7th, May, 2020’
팀원에게 물어봐도 오늘은 5월 7일이라고 한다. 어버이날 전날, 목요일. 내가 미친 걸까? 아니면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왜 나한테 영화에서나 본듯한 일이 발생한 거지? 그럼 내가 같은 하루를 다시 사는 거라고? 별의 별생각이 오전 내내 들었다. 심지어 계속 오늘을 반복하면서 사는 건 아닌지 라는 공포까지 들었다. 이미 비슷한 소재로 한 내용의 영화들이 몇몇 있었기에 그들이 영화에서 이런 현상(?)을 어떻게 겪는지, 그리고 이용하는지에 대한 간접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나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만약 어제와 같은 오늘이라면 어제 생겼던 일이 동일하게 일어나야 나의 미래는 바뀌지가 않는다. 그럼 오늘 난 그녀를 만나서 저녁을 먹게 될 것이다. 다른 일들이야 평상시랑 큰 차이 없이 보냈던 평범한 하루였으니.
그렇게 생각하고 난 오후에 어제 그녀가 연락했던 하지만 오늘도 연락하게 될 그 시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하고 집중이 되지 않은 상태로.
‘오늘도 퇴근하고 운동 가요?’
어제 아니 오늘 아니 나한테는 어제 아니 나한테도 오늘 정확히 그 시간에 문자가 왔다. 너무도 놀라서 폰을 손에서 떨굴 뻔했다. 내용은 과거의 오늘과 같은 내용이었다. 레슨이 취소되었고 저녁을 먹자는 내용. 그럼 아마도 그녀와 회사 앞에 직장인들의 삶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고깃집에 가서 돼지갈비와 맥주를 한 잔 하겠지? 음…. 그리고 또 뭐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난 오늘 무조건 정시퇴근을 해야 하기에 일을 하고 있던 중 팀원이 지나가는 말로 과거의 오늘 했던 이야기를 툭 던졌다.
“팀장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오전이랑은 완전 다른 사람인데요”
그렇다. 오전이랑 뭐가 다르다는 거지?라는 의문이 바로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난 오전에 내가 겪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겪게 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멘붕상태였다. 그럼 과거의 오늘도 같은 현상을 겪었다는 말인가? 점점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을 겨우 진정시키고 일을 해야만 했다. 왜냐면 난 오늘 정시퇴근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나의 과거의 오늘과 똑같이 그녀를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같은 고깃집에 가서 메뉴를 주문하고 먹는 찰나에 내 머릿속에 그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옆팀의 팀장이 그녀를 보면서 여자친구냐고 물어봤던 것, 그리고 아직은 아니라는 나의 멍청한 대답, 이에 조금은 서운한 하지만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는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다시 한번 같은 하루를 살게 된 거 좀 더 잘해 보자.
내가 겪고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 그 영화에서 깨달은 것처럼.
“어 김팀장님 식사 중이신가 보네요”
“아 네~ 오늘 회식하세요?”
“아니오 회식은 아니고 그냥 소소하게 저녁 먹으면서 맥주 한 잔 하고 있어요, 근데 누구 에요? 여자친구?”
“아 네~ 맞아요”
“아 그럼 실례했네요~ 좋은 시간 보내시고 내일 봬요”
그렇게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의 표정을 나도 모르게 살폈다. 과거의 오늘의 표정과 어떻게 다른지. 그냥 똑같은 표정이었다. 다행이었다. 내가 봤었던 그 심각한 표정은 아니어서.
“회사 사람?”
“응~ 옆팀 팀장인데 팀원들이랑 저녁 먹나 봐”
“오빠는 팀원들이랑 저녁 자주 안 먹어?”
“난 그냥 가끔~ 누군가 생일이거나 하면”
“근데 왜 오빠 마음대로 내가 오빠 여자 친구야?”
“아~음…. 혹시 기분 상 했으면 미안”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야~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곤란해”
“응~ 알겠어. 기분 상한 건 아니지?”
“응 괜찮아~”
“다행이네~ 이번 주말엔 뭐 해?”
“빨리도 물어보네~ 이번 주말엔 오빠 못 만나”
“엥? 약속 있어? 슬이랑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그래도 안돼 참어~ 그리고 혼자도 가면 안돼 거긴 나랑 다음 주에 가”
“뭐 그럴 건데 주말에 뭐 하는데?”
“응~ 어버이날 기념으로 엄빠와 여행가”
“아 그렇구나~ 그럼 다녀 와야지, 어디로 가는데?”
“강원도에 우리 가족들이 종종 가는 곳이 있어, 아빠가 회원권이 있어서”
“오랜만에 바람 쐬고 오면 좋겠네~ 그럼 난 혼자서 놀아야겠군”
“응~ 심심해도 어쩔 수 없어 참어ㅋ 이제 가자 배도 부른데 고기 냄새가 너무 많이 뱄어”
“그래~ 카운터에 냄새 탈취제가 있을 거야. 계산하고 좀 뿌리자”
“난 오늘은 그냥 혼자 갈게~ 냄새 많이 나서 그냥 택시 타고 갈라고”
“그래? 데려다줘도 되는데”
“괜찮아요~ 내일 출근해야 하니 오빠도 어서 집에 가서 쉬어야지~”
“그래 그럼 다음에 데려다주고 택시만 잡아 줄게”
그렇게 과거의 오늘처럼 그녀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단지 갈 때의 표정과 말투가 달라졌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 여자친구가 맞다는 말과 주말에 뭐 할 건지 먼저 물어본 그 2가지 때문에.
그녀가 달라진 이유가 고기가 더 맛있었을 수도, 맥주가 더 시원했을 수도 있다고 시비를 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2가지 덕택에 웃는 얼굴로 그녀를 집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어찌 보면 내가 겪고 있는 이 기괴한 경험이 나에게는 꽤나 유용한 능력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만 같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