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는데 그래도 한번 밥이나 먹어야지?’
친구 녀석이 며칠 전 연락을 해 왔다.
‘연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니냐?’
무의식적으로 말을 저렇게 했지만 근데 실제 연말이 되면 이래저래 시간 맞추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과거처럼 요란하게 송년회 모임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서도 그렇고 가정이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게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다. 그간 정신없는 주말을 보냈었는데 오늘은 친구 녀석과 편안하게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뒤로 한 채.
만나자마자 배가 나온 거 같다는 둥, 머리털이 날아간 거 같다는 둥 시답지 않은 하지만 서로를 걱정하는 험담을 몇 마디 나누고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은 연말 성수기 전이라 여느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여자 친구는 잘 계시나?”
“아니 잘 계시지 못한다”
“왜? 또 사고 쳤어? 미친놈 너 그러다가 진짜 지옥 간다”
“지옥까지 가야 하냐? 참네… 오늘 그날이라서 요양 중이시다. 됐냐”
“아 그래? 그럼 진짜 잘 계시지 못하고 있네…. 한 달에 한 번씩 진짜 힘들겠어”
“그러니까. 우리네 남자 놈들은 절대 모르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은….”
좀 더 정확하게는 안다고, 아는 척 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가끔 유튜브 알고리즘에 여자의 생리기간에 고통을 체험하는 기계를 사용하는 남자들이 나오는 영상이 뜬다. 그 영상을 보면 남자들이 죽어나가는 수준에 여자들은 ‘이게 뭐’라는 표정과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니. 남자들이 엄살이 심한 걸 감안하더라도 상상도 못 할 고통 일 것이다.
“요즘에도 그 기괴한 능력은 계속되고 있는 거야?”
“계속되고 있는 거 같긴 해. 최근에는 그럴 일이 없긴 했지만”
“그래? 사고를 안 쳤나 보네. 이제는 착실하게 잘 살고 있나 보네 ㅎㅎ”
“그런가? 그것도 그렇고 요즘 주말에 이래저래 할 일이 많다 보니”
“거기 합류하는 일 때문에? 할 만하냐? 주중에 일 하고 주말까지 하려면 이래저래 힘들 텐데”
“아직까지는 괜찮은데…. 아무래도 여자 친구가 많이 신경 쓰이지”
“그래도 주말에 하루는 만나긴 하지?”
“당연하지. 내가 거기로 옮기는 거 허락(?) 받는 조건 중 하나였는데”
“근데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병행하는 거 너네 관계에 좋지 않아.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못 써줄 테니”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나은데?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아직 법인 설립한 지 몇 개원 되지 않는 곳으로 가라는 거야?”
“내년 3월에 합류한다고 했었나? 어차피 합류하는 거 지금 하는 거랑 무슨 차이야? 인센티브 때문에?”
“그게 가장 큰 이유이긴 하지.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가는 건 좀…”
“3월 되면 뭐가 되게 많을 거 같아? 그렇지 않아. 난 솔직히 이런 몇 개월이 너와 여자 친구의 관계에 문제가 생길까 봐 더 걱정이다. 이번엔 너를 꼭 유부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거든 ㅎㅎ 얼마나 좋은데”
그 말도 일리가 있다. 스타트업을 주변에서 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지금 합류한다고 하면 표면적으로는 한 가지 일만 하게 되고 그 전과 같은 평범한 직장인의 주말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금전적인 인센티브를 받는 것도 지금 나에겐 꽤나 중요한 일이긴 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내 머릿속 한편에는 ‘다 우리를 위한 일이야. 나와 그녀 모두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몇 개월만 내가 고생하면 된다는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책을 많이 읽고 후배들에겐 그런 어쭙잖은 조언을 하는 주제에. 현재 나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이면서 ‘우리’를 위한 행동이라는 그냥 별로인 핑계를 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