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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八

by 그런남자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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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8’ 


아침에 눈을 반쯤 뜨고 흐릿하게 침대 옆 폰을 들어 시간을 보고 정신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발사되듯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했겠지만 회사를 옮기고 나서는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은 편해지면 점점 늘어지는 건 본능인가 보다는 생각을 하고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음악을 틀고 아침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잠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폰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난 의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 위에 적혀 있는 날짜를 보고. 


‘2021년 4월 18일 (Sun)’ 

또 일요일인 것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하게 알람이 울리지 않았고. 그리고 어제 그녀와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동시에 하루 종일 불편해하면서 지냈던 것까지. 


한때는 ‘하루 다시 살기’가 기회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다시 한번 살기를 간절히 바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 오늘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늘의 어제를 다시 산다고 해도 어제의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제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참지 못하고 욱 했던 마음을 참아 낸다면 그 이후를 조금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그 생각이 들 뿐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고,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쉰다고 할까?’라는 못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래도 그건 너무 비겁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차피 어제의 일을 그녀는 모르는데 크게 상관없지 않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몸이 안 좋아서 점심에는 조금 쉬고 저녁을 먹자고 해야겠다는 생각.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면 ‘그게 뭐가 좋은 생각이냐?’라는 한심한 표정으로 나에게 욕을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나는 굳게 믿었다.


시간을 보니 어느덧 11시가 다 되어 가서 빨리 그녀에게 알려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메시지 창을 열었다. 메시지를 입력하다 불현듯 전화를 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응~ 나 이제 막 나가려고 하던 참인데”

“아 그래? 다행이다 슬아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감기야? 아니면 다른 곳이 아파?”

“그냥 심한 건 아닌데 머리가 좀 아파서. 약 먹고 좀 쉬면 괜찮아질 거 같아”

“알겠어 그럼 약 먹고 좀 더 자. 상황 보고 다시 연락해줘. 걱정되니까”

“응 미안해…. 준비 다 했는데”

“괜찮아 어서 전화 끊고 약 먹고 푹 자”


전화를 침대로 던져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약간의 안도감도 있었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행동이 너무도 비겁하고 지질하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냥 오늘 하루는 ‘합리화의 인간’이 되어 그렇게 지내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끔은 피하는 것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다는 생각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를 들고 책상의자에 앉아 랩탑을 켰다.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ott에서 영화라도 한편 볼까 라는 생각으로 사이트를 열고 이리저리 둘러봤다. 딱히 보고 싶은 것이 없어 그냥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 몇 개를 보고 랩탑을 닫았다. 책이나 볼까? 하고 책을 들었는데 이것 역시 몇 장 이상 진도를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딱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집안일이야 오늘 데이트를 위해서 어제 다 해둬서 더 이상 할 것도 없고. 그러고 보면 연애를 시작 한 이후로는 주말 중 하루는 항상 데이트를 했기에 데이트를 안 하니 뭘 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연애 전엔 뭘 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침대커버 및 침구들을 다 벗겨서 세탁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봄이 되고 해서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기에.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봐도 머릿속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이다. 더 힘든 건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더니 몸도 찌뿌둥하고 머리도 좀 아픈 거 같았다. 전형적인 집돌이가 아닌 나로서는 집에만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주변 집돌이들에게 과외라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시계를 보니 1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러닝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뛰러 갈 준비를 했다. 뛰고 와서 샤워하고 그녀와 저녁을 먹으러 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와 보니 낮이긴 했지만 아직 여름은 아니라서 뛰기에 적당한 날씨다. 스마트워치에 거리를 맞추고 달리기 시작한다. 난 그렇게 빨리 달리지도, 오래 달리지도 않기 때문에 러너들이 말하는 ‘러너스 하이’를 느껴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확실히 어느 정도 거리를 달리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은 든다. 나에게 ‘러닝’은 ‘명상’과도 같은 느낌이라서. 


기분 좋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며 시계를 보니 시간은 16:30을 향해가고 있다. 집에 가서 그녀에게 연락하고 샤워하고 나가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집에 도착하고 비번을 누르고 문을 열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신발장에 그녀의 신발을 보고. 


“아프다고 해서 걱정돼서 뭐 좀 사 왔는데 러닝 할 정도면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었나 봐?”

“어…. 어 조금 나아졌는데 몸이 좀 찌뿌둥 해서 좀 뛰고 왔어”

“그래 뭐 좀 사 왔으니까 샤워하고 먹어. 아픈 거 같지 않으니 난 갈게”

“아니야 지금 같이 먹자. 먹고 가”

“됐어. 어서 샤워해. 그러다가 진짜 감기 걸려”


‘진짜 감기’라는 말이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제의 어제처럼 그녀가 나를 스쳐 나가는데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던 그녀의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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