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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Sep 20. 2023

영오탕

영오탕


다 벗고 만나는 곳 

청청하던 가슴을 이겨버린 등이

아버지 존재를 슬며시 말아 잠그면

그 엉거주춤한 등줄기를 읽다가

불효자도 뻔뻔하게 신파의 저릿함을

인용하게 되는 곳


같은 온탕에 벗은 몸을 함께 담그면

아버지와 내가 같은 양수 속에 누운

태아가 된 듯, 우리 부자(父子)는 말없이

그저 새삼 부모 자식 사이라는 것을,

사내라는 것을, 그간 힘들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물에 둥둥 뜬 남의 땟조각 따위는

개의치 않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담담히 뜨거울 뿐


때수건으로 아래에서 위로 

시원하게 등을 밀어 올리면

후두둑, 떨어지는 때

그 때의 때들이 말로 전하지 못한 

오랜 안부의 자음이고 모음인 듯

그 때들 일일이 따져 묻지 않고

바가지에 뜬 물로 씻어 내리면

그제야 서로의 안녕이 다행스럽다


한 번도 부자였던 적 없는 서민의 아들

그 서민의 아들이 그의 아들과 목욕탕에 앉아

그래도 여전히 우리 부자(父子)라는 것이

내 존재를 가난하지 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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