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벗고 만나는 곳
청청하던 가슴을 이겨버린 등이
아버지 존재를 슬며시 말아 잠그면
그 엉거주춤한 등줄기를 읽다가
불효자도 뻔뻔하게 신파의 저릿함을
인용하게 되는 곳
같은 온탕에 벗은 몸을 함께 담그면
아버지와 내가 같은 양수 속에 누운
태아가 된 듯, 우리 부자(父子)는 말없이
그저 새삼 부모 자식 사이라는 것을,
사내라는 것을, 그간 힘들었다는 것을,
그리하여 물에 둥둥 뜬 남의 땟조각 따위는
개의치 않아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담담히 뜨거울 뿐
때수건으로 아래에서 위로
시원하게 등을 밀어 올리면
후두둑, 떨어지는 때
그 때의 때들이 말로 전하지 못한
오랜 안부의 자음이고 모음인 듯
그 때들 일일이 따져 묻지 않고
바가지에 뜬 물로 씻어 내리면
그제야 서로의 안녕이 다행스럽다
한 번도 부자였던 적 없는 서민의 아들
그 서민의 아들이 그의 아들과 목욕탕에 앉아
그래도 여전히 우리 부자(父子)라는 것이
내 존재를 가난하지 않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