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뜻한 만년필 Oct 23. 2020

달맞이꽃 엔딩

이제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만

 TV 채널이 무수히 다양해지고, IPTV,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과거에는 없던 새로운 시스템과 장비들이 일상을 잠식하며 우리는 가히 정보와 콘텐츠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음악의 위상은 그 가운데 지극히 일부로 전락한 느낌이다.

부모님이 듣는 음악이 우리가 처음 접하는 음악

  우리는 어떤 기회로 처음 음악을 접했을까? 대개의 경우는 부모님이 듣는 음악이 바로 내가 처음 접하는 음악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나의 아이들(초등, 중등)도 이런 영향으로 비틀스도 알고, 마이클 잭슨의 문워킹도 알고, Last Christmas도 좋아한다. 이런 걸 보면 부모가 되면 내가 듣는 음악은 나만 듣는 것이 아니니, 더 좋은 음악을 많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용필 1집 (1980년 발매)

 어릴 때 우리 집에는 Goldstar(현. LG) 브랜드가 양각으로 선명하게 찍힌 전축이라 불리던 오디오 시스템이 있었고,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등의 명곡들이 수록된 명반 조용필 1집, Saturday Night Fever O.S.T, ABBA의 ‘Voulez-Vous’ 등의 LP음반들이 있어서, 환상의 음악 세계로 입문하는 기회를 제공받았다. (이 지점에서 부모님께 또 한 번 감사드린다.) 라디오도 많이 들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청자의 의지’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로 분류해 본다면, 하나는 어떤 음악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수동적으로 듣는 사람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적극적으로 찾아 듣는 사람들이다. TV도 가능은 하지만 전자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무래도 라디오 듣기다. 그리고 예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원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음반 구매, 방송에 신청곡 보내기, 녹음 버튼과 함께 라디오 앞에서 기다리기, 음악카페에서 신청곡 넣기 등을 지속적으로 했다.


 학창 시절, 신청곡을 틀어주는 음악카페를 많이 찾아다녔다. '어디 가면 음반이 몇천 장 있다더라'라는 정보를 접하면, 거기 가봐야 기껏 1~2곡의 신청곡을 듣게 될 텐데도, 마치 거기 있는 음반을 다 들을듯한 기세로 그곳엘 가곤 했다. 지금처럼 커피가 맛있는 곳이란 개념은 없었고, 대신 음반이 많은 곳은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DJ의 뒤편에 빽빽하게 꽂힌 음반들은 그 자체로 좋은 구경거리였다. 신청곡을 적어내면 뮤직비디오를 틀어주는 곳도 있었다. 지금처럼 유튜브가 없을 때여서 그런 곳도 인기가 있었다. 스크린과 빔프로젝트를 활용하니 어두컴컴했지만 ‘보는 음악’은 듣기만 하는 것에 더해 감각을 더 충족시켜주는  마력이 있었다.

 온갖 신청곡을 모두 틀어주는 방송국에는 음반이 몇 장이나 있는 것인지 늘 궁금했다. 여기저기서 대여를 할 테니 같은 음반이 몇 장씩 있을 것이고, 방대한 규모일 것이 확실한 방송국 저장창고를 구경해보고 싶었다.


  예전엔 원하는 음악을 듣는 일은 어떤 절차를 꼭 요구했다. 구입하고, 신청하고, 찾아다니는 일들은 오랜 기다림을 동반하던 것이었다. 그런 기다림들이 싫지 않았다. 여행은 떠날 때 보다 준비할 때 더 설렌다고들 한다. 음악을 기다리는 시간도 그러했다. 음악카페에서 '신청곡을 적은 메모'를 넣어본 적이 있는가? 그때부터는 한곡 한곡이 끝날 때마다 다음 곡에 두근두근 하던 시간을 나는 기억한다. 원하는 음악을 기다리는 시간들은 언제나 큰 설렘이 함께하는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이제 음반은 존재가치가 없어졌고, 신청곡을 받아 주는 곳도 라디오뿐이다. 라디오에 음악을 신청하는 이유도 과거의 그것과는 다르다. 들을 수 없는 음악을 듣거나 녹음을 위함이 아니다. 어떤 음악이든 스스로도 언제든 들을 수 있지만, 단지 내가 선택받았다는 짧은 기쁨, 같은 주파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동시간에 내가 신청한 곡을 함께한다는 특별한 희열을 위해 신청한다.


 원하는 노래를 카세트테이프에 담기 위해 라디오 앞에서 죽치고 있었던 적이 참 많았다. 당시에는 다들 그랬으니, 이런 경험은 그 시절을 지낸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갖고파 하고, 그럴 때 오랜 기다림은 좋은 쪽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열매를 더 달게 느끼게 한다. 하지만 ‘수주대토’를 떠올리게 하는 기약 없고 막연한 그 시절의 하염없는 기다림에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 같다.

달맞이꽃 (꽃말 : 기다림)

 이젠 '기다림의 시간' 얼마나 될까? 10초? 15초? 오직 개인의 검색 능력에 달렸다. 재빠른 손놀림은 원하는 음악을 즉시 귀로 배달한다. 그 짧디 짧은 시간은 설레거나 달콤하지는 않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전 06화 달콤한 사랑과 아픈 이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