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이 오고 빌보드는 달라지고
Pop음악을 듣기 시작한 건 대략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방학 동안 하루 종일 집에서 라디오를 켜놓고 있으면 거기엔 김기덕, 이종환 님이 있었고 Take on me(a-ha), We Built This City(Starship), I Just Died in Your Arms(Cutting Crew), Faith(George Michael), Bad(Michael Jackson) 같은 세련된 음악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흘러나왔다. Pop음악을 듣다 보면 자연히 빌보드에 관심이 가게 되어있다. 라디오 방송 여기저기서 미국에서 인기 있다는 곡들을 빌보드 순위와 함께 소개했다.
음반 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기에는, 한 주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노래의 순위인 빌보드 HOT 100은 무엇보다 음반 판매량에 의존했다. 이제는 음반이라는 말조차 생소해지고 음원이라는 말이 그것을 완전히 대체해버렸다. 그마저도 구매가 아닌 스트리밍(듣기만)이라니...
이런 차이는 빌보드 차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순위에는 격변이 일고, 과거의 기준으로 본다면 오늘날의 빌보드 차트는 심하게 왜곡되어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현상 또는 원인을 3가지로 요약해 본다.
첫째, 싱글 컷이 없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아티스트가 새 앨범을 발표하면 수록된 여러 곡 중에서 일부를 선별하고, 그중 가장 경쟁력이 있는 것부터 시차를 두면서 순서대로 한곡(또는 두곡)이 들어있는 작은 음반(실제로 크기도 작음)을 싱글로 발매를 했다. 이것을 싱글 컷이라고 한다. 그렇게 싱글 발매를 해야만 비로소 차트에서 다른 노래들과 경쟁이 시작되었다. 시차를 두는 건, 소비자의 구매력은 언제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한곡에 전력을 집중해서 경쟁력을 강화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음원 시대에는 이런 식의 싱글 발매라는 것은 사라졌다. 새 앨범 발매(업로드)와 동시에 스트리밍 사이트 가입자들은 수록된 전곡에 접속을 시작한다. 전곡이 싱글 발매가 되어버린 효과가 된 것이다. 유명가수가 신보를 발표하면 수록된 대부분의 곡들이 차트를 점령하게 되었다. 싱글 발매는 없어졌는데 싱글 차트는 지속되고 있으니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2020년 7월 24일, Taylor Swift가 새 앨범 'Folkore'를 발표했다. 이 앨범에는 총 16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전곡이 8월 8일 자 빌보트 Hot 100에 올랐다.
‘Folklore' 앨범 곡 리스트 (괄호 안은 8월 8일 자 빌보드 Hot 100 순위, 색깔은 Top 10)
1. The 1 (#4)
2. Cardigan (#1)
3. The Last Great American Dynasty(#13)
4. Exile (featuring Bon Iver) (#6)
5. My Tears Rocochet (#16)
6. Mirrorball (#26)
7. Seven (#35)
8. August (#23)
9. This Is Me Trying (#39)
10. Illicit Affairs (#44)
11. Invisible String (#37)
12. Mad Woman (#47)
13. Epiphany (#57)
14. Betty (#42)
15. Peace (#58)
16. Hoax (#71)
사실, 이런 현상은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겐 낯설지 않다. 아이유나 아이돌 그룹이 새 앨범을 발표하면 국내 음원사이트 순위에서 1위부터 일제히 한 가수의 노래가 나열되는 것에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미 익숙하지 않은가. 빌보드 차트도 순위 집계 방식이 음원사이트를 닮아가면서 이런 현상이 짙어지고 있는 것이다. Drake, Post Malone 등 특히 차트에서 강세를 보이는 정상급 가수들이 신보를 내면 이런 현상이 매번 나타난다. 이런 걸 보면 요즘 싱글 히트곡과 과거의 그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둘째, 크리스마스 같은 특정 시즌의 영향을 심하게 받게 되었다. 예전에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언제나 캐럴은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캐럴의 인기가 음반 판매로 연결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로 한계가 있다. 라이선스의 문제 일수도, 음반 재고, 생산라인의 문제 일수도 있다. 아무튼 이미 오래돼버린 곡의 새 음반을 구매한다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음원 시대엔 다르다.
2019년 크리스마스 시즌 빌보드 Hot 100에는 15곡의 캐럴 또는 크리스마스 관련 노래가 올라 있고, Top 10에도 4곡이나 있다. 그중 53위를 차지한 Jonas Brothers의 'Like it's Christmas만이 유일한 2019년 신곡이다.
크리스마스가 포함된 2019년 12월 28일 자 빌보드 차트에 오른 캐럴 (괄호 안은 음반 발매 연도)
1위.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 Mariah Carey (1994년)
2위. Rockin' Around the Christmas tree - Brenda Lee (1958년)
6위. A Holly Jolly Christmas - Burl Ives(1965년)
9위. Jingle Bell Rock - Bobby Helms (1957년)
15위. It's the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 - Andy Williams (1963년)
17위. Last Christmas - Wham! (1984년)
23위. Feliz Navidad - Jose Feliciano (1970년)
28위.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 Dean Martin (1959년)
30위. The Christmas Song ( Merry Christmas to You) - Nat King Cole (1946년)
36위.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 - Gene Autry (1949년)
37위. Sleigh Ride - The Ronettes (1963년)
40위. Happy Holiday / The Holiday Season - Andy Williams (1942년)
47위. Here Comes Santa Claus (Right Down Santa Claus Lane) - Gene Autry
50위. It's Beginning to Look a Lot Like Christmas
- Perry Como and the Fontane Sisters with Mitchell Ayres & His Orchestra (1947년)
53위. Like It's Christmas - Jonas Brothers (2019년)
Mariah Carey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는
발매 25년 만에 빌보드 1위를 달성했고,
앞으로도 한동안 매년 12월에는 1위를 노려 볼만하다. ‘매년 특정시기에 1위를 노리는 노래’라는 개념은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Mariah Carey는 25년 전에 황금알을 낳아놓았다.
셋째, 특정 아티스트의 신상 변화가 차트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상 변화라 함은 그래미 수상 같은 경사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망이다. 2016년 4월 21일, 시대를 풍미했던 뮤지션 Prince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이런 사건은 그를 사랑하는 팬들도, 그를 모르던 사람들도 그의 음악을 찾게 만든다. 이런 움직임이 반영된 2016년 5월 7일 자 빌보드 차트에는 Prince 노래가 6곡이 있다. 이런 현상이 더 강해져 8곡이 더 높은 순위로 올라 있는 2016년 5월 14일 자 차트다.
4위. Purple Rain (1984년 'Purple Rain' 앨범 수록)
8위. When Doves Cry (1984년 'Purple Rain' 앨범 수록 )
20위. Little Red Corvette (1982년 '1999'앨범 수록)
23위. Kiss (1986년 'Parade'앨범 수록)
25위. Let's Go Crazy (1984년 'Purple Rain' 앨범 수록)
27위. 1999 (1982년 '1999' 앨범 수록)
33위. Raspberry Beret (1985년 'Around the World in a Day'앨범)
39위. I Would Die 4 U (1984년 'Purple Rain' 앨범 수록)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듯
30년이 넘은 Prince의 노래들이 수많은 신곡들을 넘어선 것이다.
빌보드 1위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운발도 아주 중요하다. 가급적 강력한 경쟁곡이 없을 때라면 아무래도 더 유리하다. 차트의 상위권을 꾸준히 공략하던 BTS가 빌보드 Hot 100에서 2020년 9월 드디어 처음으로 1위를 차지한다. 그전까지는 순위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던 것이 2012년에 2위까지 갔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강남스타일도 운이 좋았다면 1위도 가능했겠지만(유튜브 조회수가 반영된 지금의 집계 방식이면 충분히 1위를 했을 것이다) Maroon 5의 'One More Night'을 극복하지 못하고 7주 동안 2위만 기록하다가 퇴장했다.
소바자들은 그간 발매된 모든 노래에 누구든 언제든 접속 가능한 세상에 살게 되었고, 아티스트들에겐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되었다. 이번 주 빌보드 차트를 노리는 현실의 아티스트는 이제 수십 년 전, 심지어 7~80년 전의 노래들과도 경쟁을 해야 한다.
빌보드 Hot 100이란 것이 ‘한 주 동안 대중들이 가장 많이 찾은 인기곡’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처럼 모든 상황이 거름망 없이 차트에 반영되는 것이 무조건 맞지만, 이런 현상 자체가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 아직도 낯설게만 보인다. 아직도 스트리밍보다는 다운로드를 더 선호하는 시대 부적응자인 필자는 적응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