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한분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함께 공저 책을 쓰자고 마감을 정했더니 막상 글이 더더더더 안 써진다고요. 아마 그 분만의 고민은 아닐겁니다. 저도 종종 겪는 일이고요. 어쨌거나 이 글을 읽으시면 무엇을 적어야 할지 술술 생각나시도록 처방을 해드릴까 합니다.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떠오르면 끝까지 읽지 마시고, 우선 글부터 쓰고 이 글은 다시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속의 있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는 일입니다. 글이 안 써진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것들이 마구 뒤섞여있거나 꽉 막혀서 잘 나오질 않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섞여있는 생각들 중에서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주제에 부합하는 생각을 꺼내는 방법을 찾거나 막혀있는 것을 뚫어주는 게 핵심일 겁니다.
오늘은 다양한 방법으로 글쓰기를 수월하게 도와주는 비상약과 예방약, 그 약을 조합해서 복용하는 방법들을 알려드릴까 합니다.
1. 노란약
- 증상 : 생각이 막혀서 답답하거나 머리가 복잡할 때
- 용법 : 의식의 흐름대로 마구 쓰기, 관찰한 대로 기록하기, 가볍게 끄적이기
지금 떠오르는 생각을 마구 적어보는 것입니다. 우리 머릿속에 생각의 층이 여러개 있다고 생각해 볼게요. 만약 나는 위로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데, 지금 나는 위로와는 상관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면 우선 나를 답답하게 하는 막힌 부분부터 걷어내야 그 속에 있는 다음 이야기를 꺼내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내 의식의 표면에 있는 생각들을 거침없이 적어보는 것입니다. 적다 보면 많은 것들이 발견됩니다. 오늘 나의 상태, 감정, 사건 등 다양한 것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굳이 세세하게 적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글의 목적은 걷어내는 것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고 나면 다음 글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2. 파란약
- 증상 : 머리나 마음이 텅 빈 듯 아무런 생각이 안 날 때
- 용법 : 종이책 읽기, 전자책 읽기 (주의 : 뉴스나 유튜브 영상 등은 제외)
머리에 생각이 많아서 쓰기 힘들 때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치 속이 텅 비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비어있으니 응당 쓸거리가 없을 테고, 이때 드는 감정은 막막함일 겁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약은 자신에게 힘이 될만한 좋은 책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아무 글이나 읽으면 안 되냐고 반문하실 수 있는데요. 네 안됩니다. 뉴스기사나 가십거리, 유튜브 영상 등으로 콘텐츠를 읽지 말고, 가급적 종이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종이책이 없다면 전자책도 괜찮습니다.
당연하게도 좋은 인풋은 좋은 아웃풋을 만듭니다. 건강해지고 싶다면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좋은 글을 읽어야 합니다.
3. 초록약
- 증상 : 같은 장소에서 잘 쓰다가 글이 막히거나 답보상태일 때
- 용법 : 걷기(산책), 운동하기(몸쓰기),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해방해 주기
어느 정도 글쓰기 루틴이 잡혀있는 상태인데도 가끔은 글이 유독 안 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산책을 나가 보는 게 좋습니다. '뭘 써야 하지?'라며 골똘히 생각하기보다는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편하게 길을 걸어봅니다. 바람도 느껴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살펴보세요. 오감을 활짝 열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세요. 글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가장 잘 써지는 법입니다. 글이 막히는 이유는 너무 잘 쓰려고 하거나 생각의 범위를 너무 제한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항상 "잘"이라는 단어가 발목을 붙잡게 마련이거든요. 걷는 것보다 조금 더 액티브한 활동을 원한다면 조깅을 하거나 운동을 하고 와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4. 투명약
- 증상 : 모든 증상, 평소에도 상시 복용 가능
- 용법 : 짧은 명상, 호흡에 집중 (언제 먹어도 좋은 글쓰기의 비타민)
글쓰기를 위한 루틴으로 삼아도 좋을 꿀팁, 바로 5분 명상입니다. 원한다면 시간은 더 길어도 괜찮습니다. 산책이 외부세상을 탐험하는 시간이라면, 명상은 내면의 세상을 탐험하는 시간입니다. 명상앱을 활용하거나, 유튜브에 원하는 시간에 맞는 명상음악을 찾아서 잠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해 봅니다.
2) 자리준비 : 원하는 자리에 앉거나 눕습니다. 바닥이나 딱딱한 의자 (소파는 비추)를 추천합니다. 이때 손은 자연스럽게 모으거나 혹은 편안히 다리 위에 올려 놓습니다. 몸이 조금 지치거나 힘들 때는 바닥에 大자로 누워서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3) 호흡시작 : 지그시 눈을 감은 뒤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뱉어 보세요.
지금 가볍게 3번만 호흡 해볼까요?
5. 빨간약
- 증상 : 가장 빠르게 글감을 얻는 효과를 얻고 싶을 때
- 용법 : 밑줄 친 책 읽기, 접어두거나 책에 메모해 둔 내용 찾기, 독서노트 읽기
아주 빨리 글에 몰입하고 싶다면 비상약이 있습니다. 바로 책에 줄 친 문장을 찾아서 읽는 겁니다.
책에 밑줄을 그어놓았거나 접어놓았던 페이지, 포스트잇 인덱스를 붙여놓은 페이지들만 골라서 읽으면 됩니다. 이런 글귀들은 이미 나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던 문장이기 때문에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짧은 시간에 관련된 생각으로 빠르게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단, 빨간약을 먹으려면 평소에 책을 읽으면서 꼭 표시를 잘해두어야겠지요? 책에 많은 흔적을 남기고, 메모도 남겨가면서 읽어보세요. 나중에 다시 읽을 때도 좋지만, 글쓰기 할 때는 정말 귀중한 글감이 된답니다.
6. 예방백신
- 용법 : 평소에 글을 쓸 때 내용 쪼개서 보관하기, 글이 잘 써질 때 일부만 써놓기, 글감 자주 모으기
- 효과 : 한번 글을 쓸 때 여러 개의 글감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고, 평소에 습관을 들여놓으면 나중에는 글감이 많이 쌓여서 글의 처음 시작이 굉장히 쉽고 편안해짐
이번에는 평소에 글이 잘 써질 때 미리 해놓으면 좋은 예방책을 알려드릴게요.
글을 쓰다 보면 처음에는 한주제로 시작했지만, 쓰다 보면 도중에 어떤 내용에서 이야기가 길어지거나 다른 방향으로 내용이 튀어나가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럴 때 보통은 그냥 글을 지우고 다시 쓰거나 일단 글을 다 쓰고 수정하거나 하는데요. 저는 이런 식으로 내용이 길어지면 우선 생각이 이어지는 데까지는 다 쓴 뒤에 그 부분만 따로 오려내어서 새 문서에다 붙여 넣고 새로운 제목을 붙여주곤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내 생각의 흐름의 한 조각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다음에 그 뒤에 살을 붙여 하나의 글로 완성하기가 무척 수월해집니다.
7. 한방약
- 용법 : 필사하기, 초서하기
- 효과 : 평소에 글쓰기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여러 글쓰기 근육을 발달시키는데 큰 도움이 됨
마지막은 한방약으로 체질을 바꿔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또 평소에 체력을 키우고, 기본기를 닦을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바로 필사(筆寫)인데요. 내가 읽어 본 책 중에서 이 책은 정말 좋고, 나도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고 느껴지는 책을 한 권 골라서 쓰고 싶은 내용을 베껴적어 봅니다. 필사는 가장 느린 독서이기도 하기 때문에 눈으로 읽으면 1분이면 읽을 내용도 손으로 한 자 한 자 따라 쓰다 보면 10분넘게 걸리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눈으로 읽을 때는 결코 느끼지 못하는 밀도 높은 독서 체험을 할 수 있고, 더불어 자연스럽게 문장을 따라 쓰면서 나의 잠재의식 속에 비슷한 형태의 문장을 적을 수 있도록 길을 닦아 놓는 훈련도 됩니다.
필사가 힘들게 느껴진다면, 좋은 문장이나 문단만 추려서 그 내용만 옮겨 적는 초서(抄書)도 좋습니다.
필사나 초서의 주의점은 직접 손으로 적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차피 나중에 인용할 때도 편리하게 워드로 치면 안 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요.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많은 선배 작가님들이 검증한 방법이기도 하고, 손끝으로 직접 적을 때 뇌가 훨씬 자극되고 활성화되기 때문입니다. 궁금하시면 둘 다 해보시는 것도 방법이고요. 가장 비효율적일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한 번은 손으로 적고, 그중에 필요한 내용을 다시 워드로 남겨놓는 것입니다. 이때 나중에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키워드를 함께 적어놓으면 더욱 좋습니다.
자, 이렇게 7가지 방법을 알아봤는데요. 정말 만약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글이 안 써진다면 위의 여러 가지 약을 2-3가지씩 동시에 복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명상을 하고 필사를 한다거나, 책을 읽으면서 초서를 하는 식입니다. 분명 더 빠르게 독서력과 글쓰기 실력이 동시에 향상되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겁니다.
어떤 방법이든 처음엔 조금 익숙하지 않겠지만,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차츰 적응하면서 글 쓰는 게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지는 단계에 도달하실 겁니다. 물론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고 해서 논리적으로나 문법적으로 완벽해진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그거대로 나중에 퇴고하면서 다시 고치면 되는 일입니다. 처음부터 너무 한번에 잘하려고 하지 마세요.글쓰기는 많은 연습과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우선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하얀색 바탕 위에 꺼내 놓는 것이 순서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병약한 사람이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다. 원기가 점차 회복되어야 약효가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질이 조금씩 변화해야 비로소 책 읽는 보람이 드러나게 된다. 學人之讀書, 猶弱人之服藥也. 元氣漸復, 乃見藥力. 氣質漸變, 乃見書功. (학인지독서 유약인지복약야 원기점복 내견약력 기질점변 내견서공) 『뇌고당척독삼선결린집』
정민 교수의 책 <흐린세상 맑은 말>에 소개된 이 글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독서하는 효과를 약을 먹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데, 글쓰기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는 서서히 꾸준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부디 평소에 독서와 글쓰기를 통하여 일상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는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곧 알게 되시겠지만, 독서(읽고 쓰는 것)는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그 관점의 차이를 꼭 경험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