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지난주를 돌아볼 때마다 꼭 하는 습관이 하나 있다. 바로 주간 플래너를 펼쳐보는 일이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11월 17일 주차에 적어둔 일정들을 훑어보니, 다행히 그 페이지는 내가 직접 적어 넣은 일정들로 가득했다. 게다가 이루지 못했을 때 표기하는 ❌엑스표시보다 완료했다는 ✔️체크표시가 더 많아 보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주 초반의 컨디션은 영 좋지 않았다. 지난 글에도 밝혔 듯, 월요일은 릴스로 휴식의 대부분을 채워버린 스스로가 못마땅해 자책감에 잠겨 있었고, 화요일은 그 잔여 감정으로 노션 포트폴리오를 리뉴얼하다 또 한 번 좌절을 맛봤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감정의 바닥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기분을 그래프로 표현한다면, 0이라는 원점보다 한참 아래를 맴돌고 있었달까.
그런데 이 그래프의 흐름을 단번에 뒤바꾼 사건이 별안간 벌어졌다. 수요일, 빨간 펜으로 꾹꾹 눌러쓴 한 문장이 그 시작이었다.
디자인 첫 수주
그렇다. 수요일은 재능 플랫폼을 통해 첫 의뢰인을 만난, 나름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물론 의도한 타이밍은 아니었다. '숨고'에 고수 프로필을 등록한 지 꽤 되었고, 캐시를 충전해 여러 차례 견적서를 보내봤지만, 성사율은 몇 주간 0%를 기록 중이었다. 프리랜서 신입에게는 기회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던 차였는데.... 거짓말처럼 첫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 참고 : 재능 플랫폼 ‘숨고’는 고객이 작성한 요청서가 여러 고수에게 자동으로 전달되고, 고수들이 유료 캐시를 사용해 견적을 보내는 구조이다. 고객은 받은 견적들 중 원하는 고수를 선택해 작업을 진행한다.
게다가 초심자의 행운이 따라줬는지, 한 번에 두 명의 클라이언트를 유치하게 되었다. 두 고객과 동시에 리플렛 디자인 상담을 진행하면서도 사실 큰 기대는 하지 못했다. 숨고에 등록한 내 포트폴리오에는 하필 리플렛 작업 사례가 부족했고, 나의 프로필에 고용 횟수가 '0'이라고 그대로 노출되는 점이 자꾸만 나를 주눅 들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상담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혹시나'라는 희망이 내게 찾아오지 말란 법은 없을테니.
다행히 두 건 중 하나는 생각보다 심플한 작업이라 대화를 나눌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전달받은 레퍼런스만으로도 어느 정도 구상이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할 만하겠다'는 판단이 서자 더욱 적극적으로 나를 어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고객으로부터 입금 완료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순간, 바닥을 기던 나의 감정 그래프가 끝을 모르고 치솟았다.
사업자 계좌에 찍힌 입금 내역을 보고도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다. 회사라는 울타리 없이, 오직 일대일 거래만으로 이렇게나 수월(?)하게 디자인 비용을 벌 수 있으리라곤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해에 단 한 건이라도 일감을 받아보자며 [고객 1명 유치]라는 소심한 목표를 다이어리에 적어둘 참이었는데, 그 목표가 순식간에 이뤄진 셈이었다. 심지어 초과 달성이었다. 뒤이어 또 다른 고객이 고용 확정을 한 뒤 곧바로 내게 자료를 보내왔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로는 소중한 첫 클라이언트들의 리플렛을 완성하느라 온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작업하는 이틀 내내 지끈거리는 편두통을 앓아야 했지만, 첫 고용이 가져다준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들을 절대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가득 품은 채,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니터 속 일러스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머리를 싸매며 고민한 결과는 다행히 나쁘지 않았다. 쿨하게 용역비를 입금했던 첫 번째 고객은 단 한 번의 수정 요청을 끝으로 결제 때보다 더 쿨하게 시안을 확정해 주었고, 요청 사항이 꽤 구체적이었던 두 번째 고객은 1차 시안을 보고 무려 이런 답변을 보내왔다. '제 마음에 쏙 듭니다'
두 번째 건은 최종 결정권자가 따로 있어 아직 확정되진 않았지만, 이미 나는 저 한 줄의 문장으로 며칠의 노고가 씻은 듯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재취업용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는 '디자인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긴 한 걸까?' 스스로 의심하곤 했다. 하지만 회사 밖에서 개인 고객을 만나고 나니, 의욕을 잃게 만든 원인은 흥미의 결핍이 아니라 '책임감의 부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믿고 맡겨줄 의뢰인이 존재한다면, 작업할 에너지는 저절로 샘솟기 마련이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잠들 때까지 디자인 레퍼런스를 샅샅이 살피던 내 모습이 바로 그 증거였다. 눈에 불을 켜고 클라이언트의 결과물만 생각하던 지난 3일은 내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껏 '완벽한 준비'에 너무 갇혀있었음을 깨닫기도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두 번째 고객과 상담을 할 때 그가 기대하는 완성도가 너무 높다는 걸 감지하고 정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복잡해 보이는 이 작업은 포기하고, 원래 계획대로 사놓은 디자인 책을 보며 예제 공부를 하는 게 훨씬 안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별안간 용기가 난 건 어이없게도 이런 마음 속 혼잣말 덕분이었다.
‘그래,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환불해 드리자.’
여차하면 깔끔하게 인정하고 환불해 주자는 생각이 느닷없이 든 것이다. 단독으로 고객을 유치해 본 적 없는 신입 프리랜서의 패기, 혹은 객기였겠지만, 진짜 저 마음이 시작이었다. 책에 있는 실전 예제 풀이보다 누군가를 실망시킬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현실의 고객과 부딪히는 게 지금의 나에게 더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도록 만든 게.
오늘은 일요일.
'환불할 각오'라는 꽤나 비장한 마음을 갖고 일주일을 보낸 지금, 다행히도 예기치 않게 주어진 과제를 무사히 완수했다는 안도감이 든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플래너를 펼쳐, 다음 주의 계획도 적어 넣었다. 또박또박 일정을 나열하면서도 사실 이런 생각이 스치는 건 막을 수 없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머릿속 계획은 언제든 손쉽게 틀어지겠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는 조금씩 이런 믿음도 생기고 있다. 계획이 틀어질수록 그것을 수습할 능력 또한 조금씩 커져갈 것이라고.
다음 주도 이곳에 무사히 생존 신고를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