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림은, 사람들은 저마다 심장에 완연하게 차오른 새하얗고 깨끗한 보름달을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들 주변으로 이렇게 투명하게 반짝이는 빛이 흐를 수 없었다.
림이 바라본 세상은 꼭 윤슬이 찬란한 강물의 표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늘 반짝거렸다. 그 빛은 대낮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무색(無色)이라 표현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그 빛은 유리잔에 비친 빛의 굴절 같기도 했다. 그 굴절들은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사람을 중심으로 너울너울 퍼져갔다. 마치 온 세상이 바다인 듯, 사람이라는 섬 주변으로 파도가 철썩였다. 각양각색의 색깔들이 물결을 따라 흘러갔고, 그 물결의 끝은 서서히 희미해져 있었다.
림이 물결처럼 흐르는 신비한 빛의 파동을 처음 발견한 때는, 그녀가 딱 열 살이 되던 해의 여름이었다.
─ 엄마 옆에 물이 흘러.
주말, 마트로 장을 보러 온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림은 엄마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았다. 물이 흐른다는 말에 깜짝 놀란 엄마는, 림의 시선을 따라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에는 물자국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 끼어 정신없이 매대를 살펴보고 있던 엄만, 엉뚱한 림의 말에 짜증을 냈다.
─ 림, 장난치지 마. 무슨 물이 있다고 그래?
엄마의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림의 두 눈은 동그래졌다. 엄마 옆으로 이어진 파장들이 다소 거칠게 일그러지면서, 약간 노란빛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전기 모양처럼 삐쭉 선 파장은 이전의 곡선의 형태를 살짝 잃은 채 흘러가고 있었다.
─ 우와! 이제는 노란빛이 됐네!
림은 엄마의 옆에 퍼진 노란 파장을 만지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은 그저 허공에서만 헛돌 뿐, 엄마 옆으로 흐르는 파장을 휘젓거나 잡을 수 없었다. 림은 작은 팔로 콩콩 뛰며, 그 빛의 굴곡을 잡기 위해 애썼다. 아랫입술은 앙다문 채, 말캉거리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정신없이 걸어 다니던 엄마는 결국 림을 내려다보며 큰 소리를 쳤다.
─ 림! 제발 좀 그만 두지 못하겠니!
그때야 림은 휘젓던 손을 내려놓았다. 엄마의 파장은 붉은빛을 뛰었고, 이제 더는 곡선형의 부드러운 물결이 아니었다. 미간 가득 찌푸린 엄마의 얼굴, 쏘아붙인 목소리, 그리고 엄마의 붉어진 파장. 파장은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곤두선 채로 엄마의 옆에 흐르고 있었다.
림은 이런 수많은 물결이 왜 자신에게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 림의 아빠가 지나가는 말로 돌아가신 할머니 이야기를 한 적은 있었다. 임종 직전, 할머니께서 사람 곁에 흐르던 물결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다. 찬란하게 흐르던 그 빛들을 잊지 못한다고. 림이 보는 그 물결이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물결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물결이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찬란하게 흐르던 그 빛들"이라고.
그러나 사람 곁에 흐르는 물결의 존재를, 림 외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림이 사람들 주변에 퍼져나가는 파장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선생님도. 빛에 대한 림의 말에, 부모님은 림이 시각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작은 의원급 병원부터 대학병원까지, 안 가본 병원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림의 시각에 대해서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그런 과정에서 림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물결들은 모두 사람들의 '진심'이라는 걸.
파장의 빛깔은 단순했다.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이 들 때는 푸른빛, 예민해져 있거나 분노가 차오를 때는 점차 붉은빛을 띠었다. 파장의 곡선 유형도 달랐다. 극심한 상태일 때는 날카로운 지그재그, 차분한 상태일수록 유연한 곡선을 그렸다. 림이 자신의 파장에 대해 사람들에게 주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다양한 물결의 형태를 보였다. 표정은 온화하지만, 물결은 노란빛으로 쭈뼛 날이 서있다던가. 어떤 때는 무관심인 듯 그저 무색의 물결만이 찰랑거리기도 했다. 거기서 림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림도 자신의 파장에 대해 더는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지 않았다.
림이 그 수많은 '진심'들을 이해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때론 그 진심들을 부정하고 싶은 날들도 있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정이었다. 그러나 림에게는 그런 여정을 누릴 자유를 박탈당했다. 단지 진실의 파동을 보는 능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것조차, 이 사람의 진심이 포장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림이 열여덟을 넘긴 해, 림은 이제 사람의 본성에 대해 확실히 깨달아버렸다. 림이 바라보는 세계에서 인간이란, 그저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속마음은 온통 증오로 가득한데, 겉으로는 웃으며 누군가에게 선물을 건넸다.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체 그저 행복해했다. 림은 그런 종류의 어지럽게 뒤섞인 불협화음의 파동을 볼 때마다 울렁거리는 속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럽게 행동할 수가 있지?라고.
림은 아름답게 찰랑거리는 파동들의 곁에 파묻혀, 인간 감정의 윤슬을 바라보았다.
림 자신에게는 없는 파동, 오직 타인의 곁에서 출렁거리는 저 추악한 진심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