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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09. 2021

처음 번 돈

1일 1드로잉, 연필깎이

#146일차

*2021.12.9. 10분 글쓰기*

처음으로 돈 번 일


처음 돈을 번 것은 고3 수험생활을 마쳤을 때였다. 같은 반 아이가 당일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함께 가자고 했다. 뭔지 모르고 따라간 곳은 여의도 방송국이었고 일이란 것은 음악프로그램의 방청객 알바였다. 방송국 앞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 오합지졸 어색하게 들어가 방청석에 앉았다. 방청객을 조련하는 역할인 듯한 남자가 앞에 서서 분위기를 띄웠다. 박수는 이렇게 치고 공연 중에는 소리를 내면 안 되고 수신호를 보내면 그때 환호성을 질러라 등을 일러주었다.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무대에 배우 김혜수 씨가 중간중간 나와서 MC를 봤다. 세션은 황신혜밴드였는데 사람 이름을 밴드명으로 지어 기억에 남았다.


공연 내용은 잊었고 첫 아르바이트비를 벌었던 그날의 인상만 강렬하게 남았다.  무척 추운 1997년 12월의 저녁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방청 아르바이트생들이 일사불란하게 방송국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두운 주차장에서 확성기를 든 남자가 간이의자 위에 올라 우리들에게 한 줄로 서라고 소리쳤다. 남자는 파카 안에 품었던 하얀 규격 봉투 뭉치를 꺼내더니 한 개씩 차례로 나눠주었고 봉투 안에는 3만 원이 들어있었다. 어림잡아도 아르바이트생이 50명 넘어 보였는데 방송에 나오지도 않을 배경이 되는 일에 저만한 돈을 뿌린다는 것에 방송국이 속 빈 강정 같아 보였다. 봉투를 받은 사람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앞만 보고 제각기 갈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교류나 대화도 없이 돈 때문에 만났다가 헤어지는 걸 보고 겁이 났다. 개별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고 떼 지은 무리로만 취급되는 것도 내내 못마땅했다.


2016년 CJ에서 일했던 이한빛 PD가 드라마 기획이 엎어지면서 하청 방송 노동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계약금을 돌려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꿈 많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젊은이의 분노에 찬 죽음과 차가운 방송국의 생리는 방청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일당을 받기 위해 줄 서있었던 춥고 외진 방송국 주차장을 생각나게 했다. 친구는 공연도 보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이렇게 쉬운 아르바이트가 어딨냐며 다음 알바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나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교사가 되어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더니 월급이 나왔다. 그때는 행정실에서 선생님마다 급여명세서를 출력해주었다. 100만 원이 조금 넘었던 첫 월급은 당시 내게 큰돈이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얼마 안 됐으니 한꺼번에 큰돈이 생긴 건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경험한 돈은 "필요한 곳은 많지만 항상 부족한 것"이었다. 교대는 한 학기 등록금이 90만 원이었고 성적이 어느 정도만 나오면 일부를 면제해주었다. 나머지 등록금과 교재비, 교통비, 식비를 충당하려면 항상 아르바이트를 2개씩 해야 됐다. 경험 삼아하는 알바가 아니고 생계를 꾸려야 하는 노동이라 마음이 가벼울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 2개는 대학생활을 즐길 시간을 내주지 않아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기도 했다.     


대학생 때 지니고 다닌 통장은 매달 말일 잔고가 몇천 원 남을 정도로 빠듯했는데 첫 월급을 받고 넉넉하게 남은 통장의 숫자가 생경했다. 대학을 나와 교단에 선 한 달 사이 처지가 달라진 것이다. 대학교까지는 돈을 내고 학교에 갔는데 교사가 되니 학교를 다니며 돈을 받고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노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부터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아이들에게 배우고 함께 지내는 시간이 좋은 나로서는 돈까지 받고 있으니 어찌 행복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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