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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녀 May 26. 2022

인어공주를 위하여


가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게으름이 있다. 우울은 분명 아니고 뭔가 흐릿한 채로 하염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다 싶은데 어쨌든 그 어딘가에 얼굴도 내밀고 필요한지 어쩐지 구분 못할 일들을 하면서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사소한 의논들과 그 의논의 해결점마저 잊고 살다가 문득, 철썩, 따귀라도 맞은 것처럼, 갑자기 바빠지고, 급해지고, 똑똑해져서(?) 언제 게을렀냐는 듯 깔끔하게 정리를 시작한다. 도대체 내 삶의 어디쯤에서 몸속으로 스며든 건지 알다가도 모를,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 누구에겐들 날 이해해 달라 하기가 좀 우습다. 멀쩡한 듯 보여도 사실은 텅 빈, 속이 허하다 못해 잔바람에도 휘청하는,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이들의 꽉 짜인 직장생활에 비하면 턱없이 헐렁하지만 그래도 직장이라고 출퇴근이란 걸 하다 보니 매일이 흘러가긴 하는데 덕질 말고는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 나는 이렇다.



본가에 가지 않는 주말엔 장을 보러 대형마트를 간다. 활동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외면 덕에  이곳저곳 싸돌아다닐 것 같지만 실상은 주로 방구석이다. 해서, 식료품을 왕창 사다 쟁여놓고 먹는 편이다. 신선식품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속으로 주어 섬기며 라면 코너로 카트를 민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 괜한 눈치를 보면서 포카 한 장이 엎드려 있는 비빔면 봉지를 카트 안으로 밀어 넣는다. 하나, 둘, 셋, 넷... 더 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이쯤이면 되었다, 스스로에게 자중을 권하고 황급히 계산대를 통과한다. 주차장까지가 너무 멀다. 에스컬레이터가 나와 카트를 실어 나르는 틈을 타 찢.었.다.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최애와 달리 내 운은 신통치 않다. 비빔면 포카 4개. 팔도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있기는 한가? 팬들을 향한 대기업의 낚시질은 도도, 선도 넘어선지 오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아지는 최애의 광고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그 덕분에 채워지지 못하는 소유욕이라는 낯선 감정을 경험중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애를 내가 독점하여 가질 수 없으니, 언젠가부터 그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고, 그것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함께’라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되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는, 대가 없는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는데 사람 마음이 이리도 간사하다. 분명 분초의 시간을 다투며 진행되는 일정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라방이 시작되면 조금이라도 길었으면 좋겠고, 하나하나 일일이 들여다 볼 시간이 없을 걸 알면서도 버블을 주고받으며 나와 나누는 대화에 꽂혔으면 싶다. 최애의 모든 일상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고 싶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응원이라고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보고, 듣고, 소통하길 원하고 심지어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부분의 접촉까지 꿈꾼다. 안다. 욕심이다.     

 

우리는 모두 인어공주다. 나와 다른, 전혀 무관한 곳에서 빛나고 있는 왕자를 사랑하는 인어공주. 그의 목숨을 구하고도-함성을 먹고 사는 그에게 함성은 곧 생명이라는 논리- 그 앞에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 그를 지켜봐야만 하는 인어공주. 잠시 그의 곁에 머물 수는 있어도 온전히 그의 삶속에 존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속한 생명체다.           



연애편지를 쓰자 / 김행숙               


어둠을 동그랗게 오려낸 

스탠드 불빛 아래서 

꿈결처럼 

너도 언젠가 그런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옛날 연애편지를 쓰자      

이 연애편지에서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밤바다의 등대나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매우 어려운 것을 

꿈꾸는 눈동자나 

노래하는 심장과 함께 

그때 우리는 열렬해 

외롭기도 해 

그랬지, 나는 오래전에 너의 창문을 두드리고 두드리다 

갔지      

세게 두드렸으면 유리창쯤 깨졌을 텐데

피도 봤겠지 

너도 봤겠지 

오버(over)하는 건 연애의 본질일까, 실수일까      

지우개는 아직 하얗고 

밤중에 밀려 나오는 지우개 가루는 검다 

모래로 쓴 글씨처럼 

애써 지울 필요도 없어

우리는 

내일 또 지워진 후에 아주 옛날식 연애편지를 쓰자            



살다보면... 이 말, 참 좋다. 살다보면....       


맑은 날도 있고, 흐린 날도 있고, 비 오고, 바람 부는 날도 있을 텐데 늘 맑은 날로만 살고 싶지는 않다. 인생의 비극을 맛보지 않고는 참다운 행복의 고마움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한 세익스피어에게 절대 동감하고 있으니까. 칸트도 말했다. 저절로 주어진 기쁨보다 기다리고 소원하던 끝에 오는 성취가 더 행복하다고. 애타게 기다리고 바라던 끝에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에 취하는 것. 그게 더 좋다. 나는 내가 갖게 된 이 마음이 이상하거나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비어있던 내 안의 공간이 필요하고 충분한 뭔가를 찾고 있었고 거기에 적당한 누군가, 사랑스럽고, 사랑할만한, 우리의 최애가 마침 눈앞에 나타난 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에 이 마음을 기록할 문장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고 나의 언어가 생명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내 말들이 앵무새의 종알거림처럼 단순하고 기계적이라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최애 덕분이다.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수많은 인어공주들과 이 마음을 나누고 싶다.      



시공간속으로 흩어질 수많은 어느 날, 형체도 없이 사라질 거품이어도 좋은, 당신과 나의, 우리들의 숭고한 사랑을 위하여, 건!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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