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는데, 단지 몇몇 장면들만 마치 오래 전에 봤던 영화처럼 떠오를 뿐 그 기억의 보존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다. 초등학교 시절의 봄, 가을 소풍 장소였던 ‘탄금대’ 임진왜란 당신 신립장군이 수도 한양을 지키기 위해 배수진을 쳤다는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고 물이라고는 구경하기 어려운 중원의 분지에서 유일한 개천이었던 달천강이 내려다보이던 그곳을 6년 동안 걸어서 오갔다. 기억 속의 나는 화판을 매고 있다. 아마도 탄금대 중턱 어딘가 쯤에서 올망졸망 앉아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늘 그렇듯 왜 거기 있었는지, 그때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고 다만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가던 그날의 지루함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되어있다. 어찌어찌 오후를 견뎌내고 학교로 돌아올 시간이 됐고 내려오는 도중에 갈림길이 나왔다. 두 길 중 한 길은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나머지 한쪽 길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었다. 도란도란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질 때까지 그 갈림길에 가만히 멈춰 서 있던 어린 나. 내 안에 어떤 유혹의 소리가 마치 막 끓기 시작한 주전자 속의 물처럼 보글거렸다.
'어느 길로 갈래? 당연히 학교 쪽이라고? 다른 쪽은 어때?'
그 순간 내가 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 지금 내 기억 속에 남겨진 단서들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고,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소리가 사이렌의 속삭임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는 사실이다. 얼마 후 아이들의 행렬이 사라지고 나는 내게 주어진 그 새로운 이탈의 시간에 가보지 못했던 새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길의 끝에는 ‘호암지’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었다. 어둡고 축축한 습지와 늘어진 버들가지 틈새로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함을 잔뜩 늘어놓은 것 같은 비릿한 물내음이 나는 곳이었는데 그곳까지 이른 뒤 나는 탈진할 대로 탈진해 버려서 어찌어찌 집에 연락을 취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의 해방일지’는 ‘옷소매 붉은 끝동’ 이후에 본방사수하게 된 새로운 드라마다. 드라마 제목으로는 생경하다 싶은 ‘해방’이라는 단어도 신기했는데 극 내용 중에 ‘추앙’이라는 단어가 이슈로 떠올랐다. ‘추앙한다’라는 말은 친분이 있어 간간히 들여다보는 여가수의 공연 중에 가끔 들었을 뿐, 일상의 대화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단어였기 때문에 그 낯선 발음이 순식간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드라마의 모든 출연진들이 이제껏 본적 없는 연기를 보여주고, 그 사실적인 연기들이 연기가 아니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자연스러웠다. 어색함마저 자연스러운 드라마. 이슈의 중심에 서있는 남자배우의 매력도 엄청났지만 내게는 여주인공의 서사가 더 특별히 다가왔다.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마음속 문장들이 이어지는 그녀의 내레이션이 마치 내 얘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시즌2가 제작된다면 그녀의 직업이 작가로 바뀌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서른 전후의 여성이 매일 일기를 쓰고, 어릴 때부터 쓰인 일기장이 박스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라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작가가 되어야 마땅하다.
아무튼, 오랜만에 이루어진 본방사수의 사슬은 꽤나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덕질에 쓰이던 나의 여유시간 중 많은 분량을 잠식했고 덕분에 내 덕질은 집중도가 떨어지게 되었다. 여전히 최애의 일상과 맞닿은 수많은 떡밥들에 목을 맸지만 그 시간이 짧아졌고 금새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냉정(?)한 판단력도 되살아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하루 종일 ‘해방’과 ‘추앙’에 대한 관심을 누를 길이 없어 최애를 까맣게 잊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죄책감이라는 손님과 함께 밤이 깊도록 사과나무를 키웠다. 강제성이라고는 1도 없고 최애는 알지도 못하는 1,250,000번째 먼지의 덕질에 죄책감이 무슨 얼토당토 않는 말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게다가 마음을 숨기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주변에 새 드라마 얘길 했더니 누군가 물었다.
‘벌써 환승이야?’
쿵! 느닷없이 떨어진 바위덩어리는 과거를 뒤돌아보게 했다. 애인이 있어 매일이 사랑이었을 때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있는 날이 있었던가? 있. 었. 다. 생각해보니 사랑과 별개인 욕정, 혹은 욕망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호기심, 관심, 충동의 대상이 분명 있었다. 아니, 덕질의 대상이 실제 연애 대상도 아닌데 그게 뭐? 최애가 바뀌기도 하고, 최애보다 조금 덜한 차애가 생기기도 하고, 그러면서 덕질의 노하우도 쌓아지고, 뭐 그런 거 아닌가? 까놓고 말해서 이게 연애감정이라 쳐도 다른 남자 눈에 들어왔다고 그걸로 마음을 바꾼 적도 없고 의리를 저버린 적도 없는데 왜? 내가 왜 찔리는 건데? 머릿속에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듯 생각들이 마구 뒤엉켰다. 흔들린 거야? 그런 거야? 아니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뭐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흔들린 거 맞네, 딴 생각 한 것도 맞고. 그럼 말 그대로 환승하는 건가?
복잡해진 머릿속으로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첫 반항(아무도 몰랐지만)과 그 결과가 떠올랐다.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충동으로 이어진 이탈, 별 것 아니었다는 깨달음과 뒤따른 피로감, 그 뒤로 어떤 일이든 결과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확실한 결심이 서지 않으면 행동 자체를 유보했던 삶의 시간들. 그리고 문득 깨달아졌다.
관심이 가는 연예인 누군가가 눈에 보이는 것과, 덕질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것은 다르다. 정확한 구분선을 그을 수도, 뚜렷한 차이를 둘 수도 없는, 단지 마음이 정하는 길일뿐이긴 하나, 분명히 다르다. 스스로 나를 분석해서 들여다보니 나는 덕질의 대상이 가족화되는 케이스 같다. 내게 가족은 주기만 해도 좋은 존재들이다. 받을 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이준호에게 품은 마음이다. 덕분에 나는 이준호를 향한 아쉬움이 없다. 그는 지금도 충분히 내게 잘 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가 즐겁게 자기 일에 집중하는 일상을 누렸으면 좋겠다. 나와 가깝게 있는 누군가가 아니어도 좋으니 그저 지금처럼, 앞으로도 스스로의 삶에 자부심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고,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웃음을 가진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주길 바란다. 언젠가 그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면 그때 오늘의 흔들림을, 혹은 내일의 흔들림을 얘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낸 마음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행복이란 활동적인 삶이 주는 보상이라고.
칸트도 말했다. 행복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의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나무뿌리들이 열매의 소식을 기다리듯이, 일상으로 흘러들어오는 사소한 사건들과 흔들림조차 위대한 그리움으로 바꾸면서 기다림이 주는 평화를 행복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나의 덕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