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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훈 Oct 22. 2023

몽족과 오지민족 난민들

아시아의 오지 기행, 고산족 순례

몽족과 오지민족 난민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나도 문득 할 말이 없어
하늘만 올려다본다


불꽃으로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등불


오늘 밤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별 하나
돋아날 것만 같다
- ‘풍등(風燈)’, 윤재훈 


오지 소수민족들을 관리하는 독특한 그들만의 체계 '오바또'


산 속 분교, 운동회 날 풍경.


중국이나 미얀마 등 인근 나라에서 넘어온 고산족들을 자국 국민으로 인정하려는 듯, 마을 마다 작은 분교들이 있어 아이들 소리 요란하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인구가 곧 국력’이라는 현 추세에 맞추어, 국토에 비해 사람 수가 적은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또한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현지인들의 눈을 피해 그들이 살기 힘든 오지로 들어가 그곳을 화전(火田)하여 옥토로 만들어낸다. 거기에다가 자국민들을 위한 먹거리를 생산해 내고, 또한 타일랜드가 아시아 쌀 수출국 1위가 되는데, 많은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양한 오지민족들의 의상과 문화가 관광수입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오지 산간 마을을 몇 개씩 묶어 '오바또'라는 독특한 구조의 관공서가 관리하는데, 옛 시절 우리의 면사무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특히나 고산족들은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현지어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오직 자신들의 언어로만 대화를 해 소통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거기에 소수민족들마다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어 통합하기가 더욱 어렵다.

단일민족에 한글이라는 위대한 글자를 가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할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몇 명 안 되는 현지 직원들과는 의사소통이 잘되지 않아, 그 지역 젊은이들을 저임금 계약직으로 고용해 현지인들과의 관계에서 윤활유 역할을 하며, 각종 자잘한 행사들을 지원하고 있다. 60세 이상 고산족 노인들에게는 정기적으로 600(24,000원)~700바트씩을 나누어 주며, 혈압이나 몸무게 등 간단한 건강검사도 해준다. 그러나 그들의 주민증을 보면 현지인들과는 약간 달라 그 차별이 역려하다. 


오지속의 난민촌 ‘맬라 난민 캠프(Mae La Refugee Camp)’


맬라캠프 내 시장 풍경.


그러나 그나마 이것도 다행이다. 이것마저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타일랜드는 대외적으로 난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미얀마와 국경 검문소가 있는 메솟을 가다보면 길가에 길다랗게 철조망이 쳐있고 그 안에 나무나 나뭇잎을 이은 듯한 집들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태국 내 최초의 난민 캠프인 ‘맬라 난민 캠프(Mae La Refugee Camp)’다. 계속해서 붙어있는 나무집들은 화재에 매우 취약해, 옛날에 불이 나 홀랑 타 버린 적도 있다.

약 35,000명의 난민이 살고 있는데, 머지않아 폐쇄될 운명이라고 하니, 이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정처없다. 이들 이외에도 이곳 매솟 지역에는 대략 57,000여명의 난민들이 캠프에 살고 있다.

입구에는 군인들이 지키며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안에는 들어가며 가운데로 길 하나가 있고 그 양쪽으로 자잘한 가게들이 있는 시장이 나오는데, 자신들이 재배한 곡물이나 손수 만든 여러 가지 물건들을 판다. 어디를 가나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지구촌 나눔운동 등 국제 NGO 등의 도움으로 학교도 운영해 나가고 있다.


맬라캠프 내, 아이들은 어디를 가나 즐겁다.


심지어 아기를 낳으면 받아주는 조산소 같은 것도 있는데, 그들이 사는 환경이나 삶의 모든 것은 너무도 열악하여, 의지할 데 없는 나라 잃은 백성의 모습으로 처절하게 다가온다.

우리도 안에서는 시끄럽지만 밖으로 나가면 저절로 애국자가 된다. 세계에서 치안이 제일 좋은 나라이고, 119대원들의 살신성인은 가히 존경스럽다. 한류 드라마와 K-Pop이 세계의 주류가 되어가는 이 나라에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

친일파들이 득세하며 나라를 팔아 그 매혈(賣血)로 자신들의 복락만 추구하던 시절에, 가족마저 돌보지 않은 채 목숨을 걸로 이 나라를 지킨 선열들에게 한없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여태까지 역사청산이 되지 못한 채 그 잔당들이 남아 권력을 휘두르며, 국립묘지에 같이 안장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손바닥만한 가게에서 손수 은반지를 만들어 파는 아가씨는 우연히 만난 서양인과 정을 나누고, 그가 보내주는 조그만 돈으로 생활을 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의 소망이 무엇이니,
내가 묻자
소녀는 하얀 잇속을 드러내며
빙긋이 웃기만 한다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나도 문득 할 말이 없어
하늘만 올려다본다


불꽃으로 아스라하게
사라지는 등불
오늘 밤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별 하나
돋아날 것만 같다
- ‘풍등(風燈)’, 윤재훈


2,000km에 걸친 미얀마와 태국 국경지역에는 총 9개의 공식 난민촌이 있는데, 미얀마로 통하는 공식적인 루트가 메솟을 지나치기 때문에 이곳이 중심도시이다. 이들 이외에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난민들이 오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십 대 막노동꾼들


오바또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


얼마전부터 오바또를 새로 2층으로 짓고 있는데, 상당히 규모의 건물을 우리처럼 레미콘 차가 와서 붓는 것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작은 콘크리트 기계 한 대를 비비며 짓고 있다. 그러다 보니 한 달이 지나도 그 진척은 더디기만 하다.

13에서17세 가량의 소년들이 잡부로 일하는데. 상당히 조숙하며 일도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미얀마에서 왔다는 스물한두 살의 청년들과 동네 아낙들도 끼여 있다. 잡부는 하루 200밧(약8000원)을 받으며, 집을 지을 줄 아는 사람들은 300밧을 받는다.

사철 무덥다 보니 이곳의 집들은 산에 무성한 나무나 대나무를 베어와 일층은 대충 얽어 가축들의 축사로 사용하고, 2층은 대나무나 판자를 잇대어 엮는다. 천장 부근은 빙 둘러 바람이 통하도록 비워놓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는데, 그것이 환기구다. 그 아래에 장작을 피우고 음식을 조리하면 그곳은 부엌이 된다. 밥상은 없으니 그냥 바닥에 놓고 먹는데, 그나마 땅바닥 위에서 먹는 것보다 더 위생적이다.

그나마 여기는 관공서 이다보니 철근으로 가느다란 기둥을 세우고 지붕 뼈대를 만들며, 그 위에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석면 위험이 있다고 철거된 스레트를 올린다. 오랜 기간 저 사람들은 이 건물 안에서 살 것을 생각하니, 얼마나 건강을 해칠까, 석면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며칠 있으며 새해가 돌아오니 현지 직원들은 하나, 둘, 고향을 찾아 자신들의 차를 타고 바삐들 떠난다. 


후아이(small river) 픙(honey) 마이(new) 마을, 몽족 사내들


돼지몰이도 이들에게는 놀이다.


마을 이름이 마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도 설명하는 듯 의미가 깊다. 열한두 살쯤 보이는 아이가 자기키보다 훨씬 큰 공기총을 매고 아빠 오토바이 뒤에 타고, 주말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간다. 여기는 대부분 집에 공기총 한두 자루쯤은 있으며 권총들도 가지고 있고, 총을 파는 상인들도 다닌다.


십오 세에 결혼하고 16세에 아기를 낳았다. 몽족 친구 ‘쏨깽’의 여동생인데, 남편은30살이다.


마당에는 17세 엄마가 부푼 젖을 스스럼없이 내놓고 아기에게 먹인다. 청년들은 동네 가게나 살라(정자)에 앉아 두 손을 마주치며 "땁 땁" 하고 성적인 이야기를 즐겨 한다. 15정도 소년들의 휴대폰에는 각국의 불법 동영상이 가득한데, 형들에게 보여주며 자랑도 한다. 10대 아이들이 무슨 영문인지 콘돔들을 몇 개씩 지갑에 넣고 있어, 나를 놀라게 한다.


몽족 청년들.


종일 논밭에 엎드려 힘든 일을 하는 몽족의 시커먼 장정들은 인근의 깔리양족들에 비해 마음이 무척 순수하고 여린 듯, 슬픈 일이 있으면 종종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도 꾸이띠야오(국수)와 카놈(과자)을 파는 집에 사는 25살 <야이>가 살라에 앉아,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며 운다.

앞집에 사는 <찡쯩리> 네와 뭔가 속상한 일이 있는 듯한데, 모닥불 가로 부모들까지 나와 서로 자기들 입장을 항변한다. 눈만 뜨면 매일 보는 사람들인데 싸우면 안 될 것 같아 마을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라고 <솜차이>집으로 내려간다. 서로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로 다정한 사람들, 담도 없이 매일 서로를 정답게 부르며 가족처럼 사는 사람들인데.


부엌 모습.


몽족은 <일부다처제>와 <조혼>의 전통, 외지인과 결혼하지 않던 풍습까지 남아있어 한두 집만 건너면 전부 일가친척이다. 또한 인근에 수많은 마을을 이루며 모여 사는 깔리양족들에 비해 외지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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