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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도시 감별사 Oct 29. 2022

릉이 있어 경주가 좋다  

1-2 경주 진평왕릉의 연두빛 봄  

경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을 꼽으라면 바로 진평왕릉을 꼽는다. 경주 시내에서 보문관광단지로 가는 길 보문 평야 안쪽 남촌마을에 위치한 진평왕릉은 논이 펼쳐진 보문 평야 한 켠에 왕릉 하나와 오랜 나무 몇 그루가 이뤄진 작은 숲이 조성되어 있는 작은 공원이다. 


단 하나의 왕릉은 주변 나무, 평야들과 잘 어우러진다. 왕릉 주변은 소나무가 주를 이루는 데 진평왕릉은 활엽수들이 주를 이룬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주변 들녘과 어우러져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이 공원의 가장 큰 미덕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무르익은 가을 주변 논이 누렇게 변해가는 계절이 제일 아름답다고 했다. 보문들판이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 왕릉 위에 올라가면 마치 돛단배를 타고 노란 바다 위에 떠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것에 의미를 두는 신라인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도 했다. 


경주를 처음 여행하는 시절 이 글을 읽고 사실 나도 몰래 그 왕릉 위를 올라가보고 싶어 내내 기회를 엿봤다.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엔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어느 초여름 이른 아침 남의 눈을 피해 슬쩍 올라가 보기도 했다. 제대로 풍경을 감상하기엔 내 심장이 콩알 만해 주변을 몇 번 두리번 거리다 내려오는 게 전부였지만 초록이 짙어지는 초여름의 보문 평야는 싱그럽기 그지 없었다. 


진평왕릉은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언제나 붐비지 않아 좋다. 아이와 함께 경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10월초 황금연휴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경주의 주요 도로는 자동차로 가득 차 있었다. 불국사 가는 길도, 보문관광단지에서 시내로 나오는 길도 거북이 걸음이었다. 경주 시내로 나오는 길 교통체증에 시달리다 문득 진평왕릉 이정표만 보고 방향을 틀었다. 불과 3분여 큰 도로 안쪽으로 들어왔는데 이곳은 딴 세상 같았다. 아는 사람들만 방문한 건지 왕릉옆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여유로운 연휴의 오후를 만끽하던 모습이 너무 황홀해 보였다. 고즈넉한 왕릉 풍경도 좋았지만 거리낌 없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즐기던 여유로움은 작은 충격을 주었다. 아이도 신난다고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오랜 세월의 문화재와 일상, 그리고 여행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그 순간이 너무 인상 깊었다. 아마 그 때 나는 경주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진평왕릉 뿐만 아니라 경주는 문화재와의 만남에 울타리를 최소화했다. 박물관과 석굴암을 제외하고는 시민의 일상에 문화재가 늘 함께 있다. 그리고 여행자도 그 장면에 함께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이 무척 좋았다.      


경주를 오가면서 진평왕릉은 늘 갈수만 있다면 빼놓지 않고 가게 됐다. 경주를 오가던 첫 해에는 평균 한 달에 한 번씩은 간 듯하다. 계절의 변화를 담고 싶어 사진을 찍으러 갔고 그냥 내 마음이 시끄러울 때면 조용히 한 바퀴 거닐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활엽수로 이뤄진 진평왕릉은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여름엔 들꽃이 왕릉과 주변으로 가득 피었고 여름엔 초록의 숲이 우거져 깊은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가을엔 누렇게 변해가는 들녘과 어우러졌고 늦은 가을이면 낙엽이 흩날리며 우수에 젖었다. 해질녘엔 오랜 고목 나뭇가지 사이로 해가 졌다. 겨울 앙상한 나무 가지의 기하학적인 무늬 사이로 왕릉이 존재감을 뽐냈다. 


진평왕릉은 어느 계절이든 좋지만 난 봄의 진평왕릉이 좋다. 경주가 벚꽃엔딩의 황홀함에 빠져있을 때 진평왕릉은 꽃나무는 없지만 오랜 세월로 인해 쩍쩍 갈라진 나뭇가지 사이로 고운 연두색 새잎을 띄우며 감동적인 에너지를 보여준다. 사실 벚꽃보다도 더 아름다워 난 지금도 4월 초에는 꽃보다 이걸 보러 늘 경주에 가곤 한다. 마치 메마르게 한 해를 보내려는 내게 다시 올해를 살아갈 힘을 주고 신명을 내라고 응원하는 거 같다. 


올 봄에도 이곳을 방문했다. 유독 다른 어느 때보다도 진평왕릉이 아름다웠다. 고목에서 자라는 연두색 잎은 꽤 많이 자라 싱그러움이 가득했고 왕릉에도 연두빛 잔디가 가득 올라오고 있었다. 나무 밑 그늘에 앉아 기타를 치는 커플, 캠핑의자를 펴고 한가롭게 피크닉을 즐기는 이들, 벤치에서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 왕릉 주변을 파워워킹하며 운동하는 아주머니까지 완벽하게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진다.      


진평왕릉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곳은 경주 시내에 위치한 노서노동동 고분군이다. 가장 큰 무덤이라고 추측되는 봉황대를 비롯해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 서봉총 등 고분 10여기가 대릉원과 큰 길 하나를 두고 옹기 종기 모여있다. 대릉원의 연장인 곳이다. 하지만 이 곳은 대릉원과 달리 담장이 없고 입장료도 없다. 오가며 자연스럽게 고분공원을 돌아본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어김없이 잔디밭에 돗자리가 깔린다. 크기가 다른 릉은 어느 각도에서 보건 다양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공원화 되기 전 옛날 사진을 보면 봉황대와 고분 사이에 일반 서민들의 집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경주 시민들에게 릉은 뒷동산이었다. 


경주 출신 지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의 어린 시절은 릉은 놀이터였다. 릉을 기어올라 미끄럼틀 타고 뒹구는 건 기본이었다. 조금 크면 릉 사이 으쓱한 곳에 일탈 청소년들이 모여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다고 한다. 

지금은 저녁에도 사람이 많고 조명이 환하게 켜져 일탈 청소년들이 모여들지는 못한다. 오히려 아침 저녁 산책 코스이자 휴식 장소로 일반 시민들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있다. 이른 아침에 나가보니 노서동 고분군 가운데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둥글게 모여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강아지와 산책도 가능하다. 


1천년도 넘는 세월을 품은 문화재와 현재, 그리고 주민의 일상이 기가 막히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곳이 바로 경주다. 거기에 여행자도 어우러진다. 여행자도 금방 시민처럼 살아볼 수 있는 곳, 경주의 묘한 에너지에 더욱 끌렸다.      


※경주시는 2022년 하반기, 대릉원의 문도 완전히 개방할 거라고 한다. 얼마전 대릉원의 동쪽 담장 일부를 허물고 문을 만들고 있었다. 완전 개방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으나 대릉원마저 개방된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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