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경주 10년전의 경주 워케이션
경주에 방을 얻었다. 성건동 동국대 부근 대학생들이 많이 자취하는 동네에 위치한 다세대주택에 작은 원룸이었다. 대릉원이 있는 구도심에 얻고 싶었지만 빈방도 잘 없었고 시설도 너무 낙후됐다. 괜찮은 곳은 가격이 좀 나갔다. 무엇보다 당시만 해도 단기간 계약하려는 곳이 잘 없었다. 계약 기간이 최소 1년은 되어야 했다.
다행히 동국대가 있는 성건동은 학생들이 학기에 따라 계약을 하기도 해서 6개월 계약이 가능했다. 월세는 30만원, 보증금은 200만원인가 했던 거 같다. 붙박이 장과 냉장고, 가스렌지 등은 갖춰져 있었다. 담배 냄새가 찌든 벽지만 새로 해달라고 요구했다. 침대는 필요 없고 일도 하고 글도 써야 하니 책상과 의자 하나만 있으면 될 듯 했다. 2월 중순 계약을 하고 바로 다음 주 입주했다. 이제부터 8월 중순까지 이곳은 나의 경주 집이다.
경주에 집을 얻은 이유는 경주를 좀 더 꼼꼼히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 첨성대가 보고 싶다던 아이 한 마디에 이끌려 경주로 여행을 온 나는 가을빛 완연한 진평왕릉에서 경주에 꽂혔고 다시 와봐야 겠다고 다짐했다. 그 이후 3주 지나고 이번엔 혼자서 3박4일 간 경주를 다시 찾았다.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풀고 시내 곳곳을 찾아다녔고 남산 등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다시 서울로 와서는 모 출판사와 계약을 맺고 경주 도시여행 가이드북을 써보기로 했다. 당시로서는 서울과 제주 외엔 국내 도시별 여행가이드북이 거의 없었던 터라 내심 기대가 컸다.
책이 계약되자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11월 중순 경주에 내려와 약 20일간 지냈다. 숙소도 옮겨가며 여기저기 다녔지만 20일이란 시간은 경주여행 가이드북을 위해 취재하기에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늦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시기라 쓸쓸한 겨울 풍경만 사진으로 담겨 몹시 아쉬웠다.
3주를 지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날씨가 추워져 더 이상 취재를 이어가는 건 힘들었다. 한 겨울 취재는 쉬기로 했다. 설 연휴이후 다시 경주에 왔다.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결론은 그냥 집을 얻기로 했다. 봄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는 가이드북 취재도 취재였지만 가장 아름답다는 경주의 봄을 아이와 좀 더 마음껏 누리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매번 큰 짐을 들고 오가기도 번거로웠고 올 때 마다 적합한 숙소 찾기도 힘들었다. 당시만 해도 경주에 게스트하우스가 막 생겨날 때여서 숙소에 대한 선택이 크게 다양하지도 않았다.
월세 집을 얻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불과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살림살이만 갖고왔다. 책상과 의자는 인터넷으로 주문해 배송을 받았고 생필품은 월세집 주변 수퍼마켓과 재래시장을 적극 활용했다.
1주일의 4일은 서울에서, 3일은 경주에서 지내고자 했다. 금요일 일하다 작은 가방만 들고 경주에 와서 토, 일요일을 보내고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늦은 오후에 서울에 올라가곤 했다. 혼자서도 경주에 왔고 한 달에 한 번쯤은 아이와 오기도 했다. 아이와 올 때면 굳이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없으면 일주일 내내 경주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때 아이는 7살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이런 생활을 못할 거라는 이유도 나의 경주행을 합리화시켰다.
물론 하던 일도 계속 해야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클라언트랑 미팅도 해야 했고 직원들과 회의도 해야 했다. 당시 정규직 직원은 한 명이었고 2명을 파트타임을 고용할 만큼 일도 적지 않았으나 직원들에게 기회를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과 휴대폰만 있으면 대부분 처리가 가능한 업무이니 경주에서도 업무를 진행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당시 난 굳이 출근 없이 재택 근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낮에는 경주와 주변 도시를 여기저기 다니고 이른 아침과 밤에 회사 업무를 봤다. 또 날씨가 굳은 날은 월세방이나 카페에 머물며 일을 했다. 전화나 문자, 메일로 직원들과 소통하고 클라언트에 업무 보고를 했다. 요즘 유행하는 지방에서 한달살기, 워케이션을 난 10년 전, 2012년에 한 셈이다.
월세방을 계약했던 6개월 동안 신나게 경주와 주변 도시를 쏘다녔다. 팝콘처럼 벚꽃이 피던 날 꽃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 들은 거 같다. 전날만 해도 아직 꽃이 안피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제히 꽃들이 피었다. 그 수런거림이라니. 왠지 가슴이 뛰었다.
경주는 정말 꽃 대궐이었다. 온통 벚꽃이 무리를 져서 폈다. 길가는 온통 벚나무였고 숲 안에도 벚나무들이 하얗게 꽃을 피웠다. 태어나서 처음 그런 꽃 대궐을 본 것 같다. 꽃은 그 전에도 피었겠지만 꽃피는 봄에 난 언제나 바빴었고 꽃이 피는 지도 모르게 지나간 적이 많았다. 꽃소식의 대명사 여의도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발걸음조차 하기 힘들었고 내가 일하고 사는 동네랑 너무 멀었다. 서울에도 군데군데 꽃이 피긴 했지만 경주만큼 온 천지에 꽃이 피지는 않으니까. 정말 벚꽃 구름이 내려온 것처럼 도시 전체가 하얀 꽃들로 뭉게뭉게 휩싸였다.
릉과 첨성대 등 문화재와 어우러져 피는 꽃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경주의 문화재는 노천 개방된 곳에도 많이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수식어는 괜히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릉도 올라가지만 못할 뿐 그 주변에 가까이 가도 된다. 첨성대도 키 작은 울타리만 쳐 있을 뿐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마당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경주 어디서나 오래된 건물 주춧돌이나 기왓장 정도는 쉽게 발견하기에 주춧돌에 아이들이 앉거나 뛰어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런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꽃 대궐이라니 경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꽃이 피던 그날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는데 결국 하루 더 눌러 앉았다. 그러곤 서울에 올라가 한 3일 만에 일을 처리하고는 아이까지 데리고 내려와 1주일 넘게 꽃놀이를 했다. 옆 고장 영천까지 쏘다녔다.
경주에 집이 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노동노서동 고분군 일대와 첨성대 주변을 경주 시민처럼 파워워킹 산책도 해보았다. 사월초파일 새벽엔 작정하고 석굴암에 갔다. 연중 유일하게 석굴암 내부를 일반인이 관람 가능한 날이다. 낮에는 석굴암까지 올라가는 토함산 도로가 거북이 걸음이라고 해 새벽에 해도 뜨기 전에 갔다. 평소 석굴암은 일반 관광객과 수학여행, 외국인여행자들이 어우러져 줄서서 입장을 한다. 겨우 입장을 하면 유리벽에 가로막힌 본존불을 10여초 잠깐 보고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유홍준 교수는 대한민국의 대표 문화재로 하나만 굳이 꼽으라면 석굴암을 꼽던데 정작 석굴암 관람은 너무 짧아 아쉬웠다. 본존불이 앉아있는 그 넘어 안쪽이 너무 보고 싶었다. 유일하게 그곳을 볼 수 있는 날이 사월초파일 하루다.
직접 코앞에서 본 본존불과 미륵보살상은 예술과 신의 영역이 함께 만나는 듯 했다. 불자가 아님에도 경외로움에 절로 합장이 나왔다. 내 표현력이 너무 비루해서 안타깝지만 본존불은 잘생겼고 미륵보살상은 너무 아름다웠다. 석굴암은 작지만 구조는 완벽했다. 왜 석굴암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인지 실감했다.
월세집을 오가는 동안 경주의 같은 장소를 아침에도 가보고 해질 녁에도 가봤다. 해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주는 아름다움과 감동이 달랐다. 집을 두니 그 포인트를 찾는 재미를 누릴 수 있었다. 여름엔 경주의 동해안과 옥산서원이 있는 계곡에서 피서도 즐겼다. 경주 뿐만 아니라 옆 고장인 영천, 청도, 양산 통도사 등도 가보았다. 멀리 갈 때면 차를 렌트하기도 했다.
그때 새삼 우리나라의 지방 도시들이 저마다 특징과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통도사는 예상보다 큰 절이었다. 입구의 울창한 숲이 인상적이었다. 영천은 지천에 복사꽃이 피는 아름다운 농촌이었다.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한반도 남쪽의 봄은 기대이상으로 화려했다. 그 해 봄을 충분히 느꼈다는 점만으로도 경주에서 머무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아니 경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다른 소도시들을 더욱 돌아보고 싶어졌다.
신나게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계약이 만료된 8월에 방을 빼면서 왠지 아쉬워서 자꾸 뒤돌아봤다. 작은 원룸이지만 그곳에서 내가 만난 세계는 이전과도 또 달랐다.
그때 출판하기로 한 경주도시여행 가이드북은 나오지 못했다. 경주에 앞서 제주 외 다른 도시편 가이드를 냈던 출판사는 제주 외 지역에서는 판매가 기대에 못미치자 원고에 대해 자꾸 이런 저런 요구를 했고 결국 발행을 중단하기로 했다. 계약금은 돌려줬다. 아쉽긴 했지만 왠지 아쉽지는 않았다. 경주와의 인연은 책이 전부가 아닐 거 같았다.
P.S
당시 집을 구하고 개인 블로그에 썼던 일기를 찾았다. 그때의 나의 감정을 공유하고자 당시 썼던 일기를 발췌해본다.
경주에 올 때면 항상 이곳, 봉황대에 먼저 옵니다.
대릉원과 대각선 방향에 위치하고 있고 노서동 고분군들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시내를 지나다보면 눈에 금새 띨 만큼 위풍당당한 위용을 자랑합니다만,
애석하게도 아는 사람만 와서 보는 릉입니다.
그리고 경주 시민들이 좋아하는 릉이구요.
경주시민들은 제각각 이 릉에 얽힌 추억 한자락쯤 갖고 계십니다.
이 릉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릉 저 뒤편 어딘가는 비행청소년들의 아지트이기도 했으니까요.
봉황대 릉선 위에는 멋진 나무가 저마다 제 아름다움을 뽐내며 서있습니다.
주변의 현대적인 건물은 고분의 위용에 놀라 올망졸망하게 느껴집니다.
누구의 무덤인지는 모릅니다만, 경주에 존재하는 릉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미뤄 짐작 컨데 어느 왕의 것이 아닐까 하더군요.
그냥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이 릉을 보는 순간 경주에 왔구나 실감합니다.
문화재인데도 울타리가 쳐 있지 않아서 좋고
도시의 지금 모습과도 묘하게 잘 어우러져서 좋고
오가다 다리품 쉬기에도 너무 좋아서 좋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아침에는 릉 한 바퀴 돌며 운동을 하고 모닝 커피를 마실래요.
밤에는 와인 한 병 들고 저 아래 벤치에 앉아 와인 홀짝이며 일몰을 보고 별을 볼래요.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언젠가는 저기 한번 올라가보고 싶어집니다.
와인 한 병이 넘치는 날 미친 척 하고 올라볼까요? ㅋ
경주에서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끝납니다.
오가는 것도 모자라 드디어 경주에 조그만 집도 하나 얻었습니다.
그래봤자 조그만 방 한 칸 있는 원룸입니다만.
매주 주말마다 경주에 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경주에 놀러오고픈 지인들에게는 그 방도 빌려드릴까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집이 생기는 순간 경주에 더 성큼 들어와 버린 듯 하네요.
경주의 봄은 더욱 죽인다고 하던데,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습니다. ^^
< 2012년 2월1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