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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do Jan 20. 2024

짧은 연애가 좋다


와이프하고는 연애한 지 1년 4개월만에 결혼했다. 어렸을 땐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꿨다. 오래도록 희생하고 견디는 게 사랑이고 그 끝이 결혼인 줄 알았다. 결혼을 단지 사랑이라는 경주의 결승선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겪어보니 결혼은 당연한 결과로 찾아오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복잡한 화학적 상호작용 외에도 가치관 같은 더 복잡한 현실적 조건까지 맞아 떨어져야 한다.


사랑으로 가는 프로세스는 결국 똑같다. 처음 만나 인사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점점 친해진다. 가식의 껍데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채 상대의 본모습을 궁금해한다. 둘은 상대방이 가식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기에 더 열심히 탐구한다. 시간이 지나면 같이 여행도 가보고 사뭇 진지한 대화도 나눠본다. 그렇게 상대방의 가식을 한겹씩 벗겨가고 헤어지지 않으면 흔히 말하는 장수 커플이 된다.


흔히들 장수 커플을 보며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둘 사이는 허물없어 보이고 서로의 어떤 모습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사랑의 프로세스가 끝난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수 커플이 헤어지는 모습을 종종 본다. 유명인 중에선 나얼과 한혜진, 류승범과 공효진 커플이 대표적이다. 사랑이라는 극도의 인내심이 필요한 프로세스를 끝내고도 현실적 조건이 맞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랑이 결혼이 아닌 이별로 끝나면 누구나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난한 사랑이라는 프로세스를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다시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머리로는 한참을 앞서가지만 현실에서 응당 거쳐야 할 프로세스가 많다. 각자의 연애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도 없다. 거듭된 재시작에 지친 이들은 패스트트랙으로 맞선을 보거나 결혼정보회사를 찾는다.



30대가 되며 사랑이라는 프로세스가 내게 조금씩 버거워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해지고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러려고 가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이런 척, 저런 척 하기가 싫었다. 어차피 정말 사랑한다면 내 본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왜 아닌 척을 해야하는지 문득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건방진 생각일 수 있겠으나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한다면 처음부터 본래 내 모습대로 하고 싶었다.


와이프와의 연애가 시작되던 날.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이야길 꺼냈다. 점수따기 위한 거짓 행동은 못한다고 했다. 상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싫어도 괜찮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내 성격과 장단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은지, 결혼하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얘기했다. 끝으로 지루한 연애는 하기 싫다고 말했다. 서로 처음부터 본 모습을 보여주고 괜찮으면 바로 결혼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핫플레이스에서 만나 밥먹고 커피마시고 집에 데려다주는 틀에 박힌 데이트는 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처럼 씩씩하게 만났다. 영원히 사랑하자는 말보다 자식을 어떻게 키우면 좋을지 얘기했다. 상대방의 모습에서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바로바로 말했다. 서로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는지도 바로 이야기했다. 그동안의 연애와 많이 달랐지만 그 어떤 관계보다 단단해졌다.


살면서 가장 짧은 기간 동안의 연애였지만 우리는 그 어느 커플보다 멋진 관계를 형성했다고 자부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새로운 길이 보였다. 한 댄서가 말한 "언니들 싸움"처럼 우리는 "어른의 연애"를 했다. 신혼인 지금 우리는 여전히 연애할 때처럼 산다. 그때 보여준 모습이 우리의 본모습이었으니까. 상대방에 대한 실망도 없고 처음보는 모습도 없다.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관계. 그것이 짧은 연애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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