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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do Jan 27. 2024

사랑을 시작할 자격


20대 초 처음으로 진지한 사랑을 시작했다. 첫사랑과 오래 연애하고 결혼까지 하고 싶었던 나로선 정말 최선을 다했다. 사귀고 싶었던 사람과 사귀게 됐고 연애사도 그런대로 잘 흘러갔다. 우린 가정 형편도 비슷했고 인생 계획도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자녀 계획이나 종교 문제도 없어 미래에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영원히 시계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잘 지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서로가 취업하기 전까지는.


당시 애인은 동갑의 교대생이었다. 통상 교대생은 4학년 때 임용고시에 합격해 바로 교단에 선다. 그 사람은 24살에 직장인이 됐다. 군복무를 막 마친 나는 대학교 3학년이었다. 먼저 취업에 성공한 애인을 따라잡고자 열심히 살았지만 그래도 학업은 마쳐야 했다. 결국 나는 애인보다 2년 늦은 26살에 직장을 구했다. 대학 시절과 군 복무, 취업 준비를 함께 하고 직장까지 다 구했으니 남은 것은 결혼뿐인 줄 알았다.


28살 어느 날 우리는 헤어졌다. 헤어지자는 말도, 붙잡으려는 말도 없었다. 그 사람은 지쳤다며 한순간 사라졌다. 요즘 말로 하면 잠수 이별이다. 8년 간의 연애가 돌연 없던 일이 됐다. 왜 우리가 이별해야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당연히 아직도 모른다. 오래 생각했는데 아마도 더 이상 관계의 발전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프로세스에 노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몰랐다.


교대생들은 주로 교내 연애를 한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데 도움이 될뿐더러 초등교사끼리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은 선택지 중 하나기 때문이다. 당시 내 애인은 특이 케이스였다. 내가 취업한 26살, 그 사람의 친구들 중에선 벌써 부모가 된 이들도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이기에 결혼도, 집도, 출산도 빨랐다. 그 친구들과 만나는 그 사람의 눈높이와 이제 막 취업해 적응하느라 힘든 내 눈높이의 차이를 줄여 나갔어야 했다.


오랜 연애가 끝나자 자연스레 위축됐다. 연애 기간 크게 다툰 일도 없었고 밉보인 일도 없었다. 성격도 잘 맞았고 입맛이나 취향도 같았다. 무엇보다도 중간에 헤어지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배려했고 생각이 다른 부분도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애썼다. 자기를 전부 내려놓는 게 연애인 줄 알았다. 그럼에도 이별했기에 더 이상 연애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작아지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가 어려워졌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도 선뜻 다가서기가 힘들었고 설령 다가간다 하더라도 금세 멀어질 것만 같아 끌어안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별이 불쑥 찾아올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나를 어필할 생각보단 누군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해서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최소한 버림받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랑을 했다.


몇 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부서 이동이라는 변화가 찾아왔다. 새로운 근무 환경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일하게 됐다. 하필이면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여럿이 같이 해야 하는 부서로 옮겼다. 어색함은 잠시 다들 금세 친해졌다. 1년, 2년을 함께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와 밥 먹는 것을 좋아하고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나 정도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덧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지난 30년 간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차근차근 정리했다. 지나간 연애사도 정리했고 성격의 장단점, 인생 계획, 직업의 특성과 전망 등 스스로를 객관화시켰다. 그러고 나니 전보다 자신감이 커졌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명확히 알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는, 그럴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결혼을 하자 주변에서 이성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꽤 받는다. 예전 같았으면 당신의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겠지만 이제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만큼 잘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나야 아쉬운 것 없이, 반강제적 배려 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미련 없이 사랑하는 법. 사랑을 시작할 자격은 나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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