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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do Mar 02. 2024

'드레스 투어' 날의 기억


결혼을 준비함에 있어서 예비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웨딩드레스 투어(드투) 날이라고 한다. 보통 본식 3개월 전에 이뤄지는데 이 날을 기점으로 예비 신부의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 정도면 날씬하다고 생각했던 몸도 막상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면 어딘가 부해 보이는 것 같아 지옥의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고른 드레스가 본식 당일의 날씨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고민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드투에 함께 가줄 거냐는 말에 시간 되면 가겠다고 했다. 현 와이프이자 당시 여자친구는 드투를 평일에 가야 한다고 했다. 주말에 가면 대여로 나간 드레스가 많아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했다. 어찌어찌 휴무일을 맞춰 같이 청담동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청담동에 차를 끌고 가봤는데 좁은 골목인 데다 주차된 차들이 많아 운전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청담동 인근 도로는 평일에도 차가 많이 막혔다. 웨딩드레스샵 주차는 무조건 발레파킹이었고 이렇게 하루에 3군데를 돌아야 했다.


드레스샵에 입장하면 일단 손님이 아주 많다. 엄마와, 친구들과, 애인과 드레스를 고르러 온 이들로 넘쳐난다. 셀렉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모습이다. 예약을 확인하고 방에 들어가면 담당이 들어와 어떤 드레스를 원하냐고 묻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떤 드레스들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골라야 한다는 점이다. SNS, 홈페이지 운영도 별로인데 그중에서 고르면 알아서 비슷한 걸로 가져다준다. 통상 돈 쓰는 자가 갑(甲)이고 물건을 파는 자가 을(乙)이지만 여기선 그 경계가 무너진다.


담당이 첫 번째 드레스를 가지러 가고 여자친구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면 남자는 혼자 덩그러니 남는다. 내가 갔던 3곳 모두 소파가 매우 불편했다. 음료수 한잔 안 주고 할 것도 없는 게 말 그대로 방치된다. 드레스룸 안이 부산스러워지면 곧 커튼이 걷힌다. 인생 처음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친구의 모습을 보자마자 기록에 착수해야 한다. 여자친구는 투어 전부터 자신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꼼꼼하게 기록해 달라고 했다. 그래야 드레스를 10여 벌 입어봐도 나중에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라도 놓칠까 긴장하며 기록하고 있으면 담당이 어때 보이는지 묻는다. 잠시 기록을 멈추고 대답하면 너무 대충 대답하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얘기한다. 예비 신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겠지만 드투에서 예비 신랑은 딱 아이폰 시리(Siri) 정도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옷과 디자인, 분위기에 대해선 내가 담당들보다 더 많이 알 것 같지만 그들은 알게 모르게 말을 바꿔가며 예비 신부 기분 맞춰주기에 올인한다. 예비 신부가 고른 웨딩드레스를 가져다준 것도 아니면서 계속 이게 더 낫다고 설득하는 모습에 다들 참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


드투는 기싸움이고 신경전이다. 한푼 두푼하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원하는 웨딩드레스를 골라야 하는 예비 신부와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이 가진 웨딩드레스 안에서 고르게 해야 하는 드레스샵 직원 간의 승부다. 따라간 남자로서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재치는 여자친구가 제대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드레스샵 직원들의 화려한 언변과 뭔가 골라야 된다는 정신없는 분위기 속에서 여자친구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객관적인 정보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 드투 날 3군데의 샵을 방문하는데 샵마다 예약 시간이 있다. 먼저 간 곳에서 늦게 끝나면 다음에 간 곳에서 입어보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겐들 없을까. 상담 시간은 항상 딜레이 되는 모습인데 여기서 착하게 기다리라는 대로 다 기다리다간 손해만 보고 끝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해진 시간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남자들이여. 드투 날 여자친구의 수족처럼 따라다니지 말고 앞장서 전사가 되어야 한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자친구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터뜨리는 것보다 여자친구가 그날 하루를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남자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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