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직관력, 촉, 감
컨테이너에 10마리를 넣어 놓고 난로를 피웠다. 추운 겨울에 이사를 했다. 연탄난로를 피우고 다른 일을 보다가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근거를 찾기도 전에 무작정 컨테이너로 달렸다. 역류한 연탄난로 연기가 컨테이너를 덮치고 있었다. 서둘러 개들을 꺼냈다.
추리나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 없이 어떤 것을 인지하는 능력을 직관이라고 한다. 흔히 촉이라고도 부른다. 백 마리 개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이다. 일렬로 줄을 맞춰 정돈해 놓을 수도 없다.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잔다. 개들의 작은 소리라도 듣기 위함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무 이유 없이 잠에서 완전히 깰 때가 있었다. 의심하지 않고 개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둥소리에 놀라 담장을 뛰어넘은 개가 떨고 있었다. 다수의 개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한 개도 있었다. 한 번은 발작을 일으키고 있던 순간도 있었다. 잠에서 문뜩 깨어났을 때에는 십중팔구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곧 죽을 개는 느낌으로 먼저 알아차린다. 편히 떠날 수 있는 준비를 서두른다. 마실 물 대신 적셔줄 물수건을 챙기고, 몸을 쉽게 뒤집도록 담요를 길게 깔아준다. 그리고 24시간 안에 대부분 내 품에 안긴 채로 떠난다. 물론 확률로 따지면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 하나가 불쑥 찾아온다.
40마리가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두 개의 문이 우연히 동시에 열리면서 밀물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사태를 인지했을 때에는 이미 사방팔방을 뛰어다니는 익숙한 개들이 보였다. 어찌어찌하여 다행히 대부분의 개들을 잡았다. 딱 3마리만 보이지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50미터 떨어진 등산로에서 한 마리를 잡았다. 유난히 신경이 가던 뒷밭 고랑에서도 한 마리를 잡았다. 나머지 한 마리는 그날 잡지 못했다. 알아서 돌아올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대문을 열어 밤새 기다렸던 개를 들여보냈다.
낌새를 알아차리는 이 느낌을 나는 신뢰한다. 무슨 일을 하다가도 느낌이 이상하면 즉각 곳곳을 살펴본다. 통화 중이던 전화도 끊고, 먹던 숟가락도 내려놓는다. 특이한 상황을 발견하지 못해도 계속 샅샅이 뒤져본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만큼 직관력은 백 마리 개들을 돌보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텔레파시인 것일까? 농담이다. 너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예전에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었다. 직관력을 이용해 동물과 소통하는 방법이다. 놀랍게도 실질적인 훈련 프로그램이 존재하고, 상당한 회원이 가입된 협회도 있다. 물론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냥 책만 좀 읽었을 뿐이다.
개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어떨까? 두 귀를 막아버릴 듯싶다. 돌보는 개의 하소연은 듣기 싫고, 돌보지 않는 개의 어려움을 아는 것은 더욱 싫다. 들리지 않으니 모른 채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개를 이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 정작 개와 소통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다. 두렵다. 기본적인 부분도 잘 챙겨주지 못하고 있다. 보란 듯이 개들 앞에 당당할 자신이 없다.
응급 신호라고 생각한다. 텔레파시 혹은 깨닫지 못한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일 수도 있다.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는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를 나는 믿는다.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우주에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노래 가사도 있다. 간절하다. 없는 초능력까지 끌어 쓸 만큼 간절하기에 나는 내 감을 믿는다.
직관력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수많은 연구와 논문, 그리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된 에너지이기도 하다. 물론 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나아가 내가 편히 잠들 수 있는 수단임에도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