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비몽사몽인 와중에 희원이 가족들이 하루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희원이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 형부가 아이들 등교 준비시키는 소리, 그리고 아이들이 소리죽여 키득대는 소리. 응? 아이들이 돌아가며 침대 머리맡까지 올라와 반짝이는 눈으로 잠이 덜 깬 나를 구경하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것이 신나고 좋기만 한 귀여운 꼬마 녀석들.
삐걱삐걱 무거운 몸으로 이층 침대에서 내려와 희원이가 차려준 빵, 과일, 커피로 유럽풍의 아침 식사를 했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사이 여행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6월을 앞둔 계절이 무색하게 냉장고 마냥 차가운 날씨에 깜짝 놀랐다. 프랑스 사람들도 이상기후에 놀라는 중이라고 했다. 다행히 이히가 미리 알려줘서 여러 두께의 옷을 챙겨왔기에 걱정 없다.
희원이는 나의 후줄근한 에코백에다가 물, 커피, 간식 등을 바리바리 챙겨줬다. 그리고 첫날이니만큼 전철역까지 함께 가서 전철 티켓도 구매해 주기로 했다. 구간에 따라 티켓 종류가 다르고 탑승 횟수도 고려해서 구매해야 한다고 한다. 이히와 형부가 어떤 티켓이 몇 장씩 필요할지 함께 고민해 줬다. 이토록 듬직한 보호자라니, 여행 초보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희원이와 함께 인근의 Saint-Maur-Creteil역으로 향했다. 100년도 넘은 건물들이 늘어선 파리와 달리 희원이네 동네는 현대의 건물이 들어선 일종의 교육도시라고 했다. 전철역을 가는 사이 한창 등교 중인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낯선 이목구비의 프랑스 아이들이었지만, 저 나이대 특유의 무표정과 느적거리면서도 성큼성큼 나아가는 걸음걸이, 품이 큰 겉옷에 백팩을 늘여 맨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어딜 가나 사춘기는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가보다 싶어 웃음이 났다.
전철역에 도착해 이히가 티켓을 구매하는데, 그 과정에서 매표소 직원과 실랑이가 있었다. 눈을 시큰둥하게 뜨고 같은 질문을 계속하는 직원과 역시나 눈을 똥그랗게 뜨고 “씨(si). 씨(si)~. 씨(si)! 씨(si)?!”라며 맞다고 계속 대답하는 내 친구 이히.
친구 얼굴에 점점 화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탑승 구간에 대해서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는데, 가끔 꼭 저렇게 시비를 거는 직원이 있다며 화를 삭이는 친구를 보니 미안하기도 하고 겁도 났다. 아니, 지역 주민조차 이렇게 퉁명스럽게 꼬투리 잡히는 일이 생긴다니. 여행의 시작부터 인종차별의 현장을 맞닥뜨리다니.
속이 상해 쫄아버린 마음을 애써 떨치며 이히가 구매해 준 티켓을 들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뒤돌아보니 이히도 상한 기분을 털며 나의 첫 여행에 건투를 빌어주고 있었다. 다녀올게, 이히! 이따 봐!
전철역은 약간 1호선 방학역 느낌이었다. 친구네 동네와 파리를 연결하는 RER선은 우리나라로 치면 수도권 광역급행철도에 해당하는데, 파리 시내 지하철보다 신식이라 훨씬 쾌적했다. 무엇보다 파리에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했다.
전철은 타고 내리는 문간과 그 양옆으로 난 2층짜리 좌석 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좌석은 기차처럼 두 줄이었고 앞뒤 의자가 서로 마주 보는 형태였다. 이방인 아시안으로서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것 같은 소심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무릎이 닿을 듯이 마주 앉는 좌석은 차마 도전하지 못하고 문간 입구 간이좌석에 앉았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할지조차 고민되는 기분이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은 적당히 시큰둥했다. 가끔 책 보는 사람이 있을 뿐 대부분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앉아 있었다.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휴대폰 중독이 심했던 지난날은 이렇게 안녕인 건가. 휴대폰은 가방 속에 고이 넣어두고 창밖과 안내 모니터만 번갈아 바라보며 짧고도 긴 일곱 정거장이 지나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