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출발 2_비행, 착륙

by sseozi
20240530_104911.jpg


드디어 비행기에 탑승했다. 내 자리가 있을 비행기 꼬리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저 멀리 좌석이 보이는데, 아이쿠, 옆자리는 어떤 아저씨인가 보다. 화장실 갈 때마다 양해를 구할 일이 민망해서 걱정이지만, 어쩔 수 없지.


무사히 좌석에 앉고 나니 비로소 아이와 남편 생각이 밀려왔다. 7살 난 아들이 엄마를 그리워할 일이 눈에 선했다. 남편에게 모두 떠맡기고 나 혼자 훌렁 하늘로 떠오를 일이 미안했다. 자꾸만 뜨끔한 기분이 드는 걸 떨치려 애썼다. 그동안 너무나도 고대해 왔던 나만의 시간, 일상에 로그아웃할 때가 왔다.


지구에 계신 여러분, 저는 무려 성층권으로 떠납니다. 13시간 동안은 off에요. 무슨 일이 생겨도 연락이 오갈 수 없는 13시간.



20240530_115747.jpg


비행기는 금세 떠올랐다. 영종도와 서해가 시야 너머로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풍경은 언제 봐도 좋다. 크으, 이러려고 창가 자리를 사수했지. 비행기에 처음 탄 사람처럼 창문에 찰싹 붙어 눈에 담고 또 담았다.



20240530_122950.jpg


어느 정도 비행이 무르익자 대부분의 사람이 창문 덮개를 내리고 어둠 속에서 잠이 들었다. 아니, 바깥 풍경이 얼마나 경이로운데요! 구름이 얼마나 황홀한데요! 이걸 안 보다니, 말도 안 돼.



20240530_122958.jpg 이불처럼 푹신해보이는 구름, 이게 정말 물방들이란 말이지?


어두운 비행기 안과 다르게 바깥은 하얀 구름에 햇빛이 반사돼서 눈이 부시도록 맑고 밝았다. 잠든 사람들에게 빛이 가지 않도록 창문 덮개를 아주 조금만 빼꼼, 나만 볼 수 있는 만큼 올리고 구름을 구경했다. 비행하는 틈틈이 몇 번이나 구경했다.


20240530_132656.jpg 양처럼 복슬복슬한 구름을 위에서 본다면 어떨지 항상 궁금했는데!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바깥은 환하고 청명한 낮이었고, 구름 아래는 바다이거나 황야이거나 산맥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시간을 거슬러 여러 나라의 낮만을 통과하는 중인가? 바깥에 도시나 건축물 같은 사람의 흔적이 보이길 기대했지만, 보이는 것은 오로지 광활한 자연뿐이었다.


20240530_203819.jpg 이토록 멋진데, 이름을 알 수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지구에 이렇게나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많다니. 새삼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실감했다. 우주먼지나 될랑가 몰라.


20240530_160848.jpg 땅에는 이름 모를 산맥이, 하늘엔 함께 비행 중인 또다른 비행기


어느 정도 바깥 풍경에 익숙해지자, 본격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비행기 모드에서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쓸 수 없다길래 잠시 멘붕이 왔었는데, 풍성한 항공사 자체 콘텐츠 목록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느긋하게 전면 모니터로 영화, 드라마, 방송, 음악 등 수많은 콘텐츠를 A부터 Z까지 모두 훑었다.


그 중 비행 중 감상하려고 찜한 영화들 :

괴물(고레에다 히로카즈), 나폴레옹, 오펜하이머, 존 오브 인터레스트, 리빙, 가재가 노래하는 곳, 미나리, 나이브스아웃, 그린북, 레이디버드, 위대한 쇼맨, 원더, 컨택트, 라라랜드, 인턴, 그래비티, 위대한 개츠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어거스트 러쉬, 빅 피쉬, 다이브:100피트 추락, 폴:600미터, 인셉션, 스즈메의 문단속, 코코, 언어의 정원, 초속 5센티미터, 웡카, 찰리와 초콜릿 공장, 알라딘, 작은 아씨들, 어바웃 타임, 그녀, 미드나잇 인 파리, 플립, 오만과 편견, 노팅힐, 비포 선라이즈, 인터스텔라, 해리포터 시리즈



20240530_170816.jpg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며 파리 여행 계획을 짜는 사치


첫 번째 선택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였다. 파리 여행을 떠나는 이 기분과 파리에서 느끼고 싶은 시대 감성에 딱 걸맞은 영화다.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와 거트루드 부인이 나누는 대화를 즐기며 뒤늦게 여행 일정을 짰다. 여행 계획 중 하루는 ‘모네 마을 기타 등등’이라고 무려 여덟 글자만 적어놨었기 때문에 이제는 진짜 계획을 짜야 했다. 계획형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하려나. 7개월 동안 뭐했냐고 물으신다면 꿈을 꾸었다고 답하겠어요, 허허. 세상엔 이런 사람도 있답니다, 저요, 저요. 이렇게 사는 것도 나름 재미있답니다. 뒤치다꺼리는 좀 (많이) 생기지만.


이러나저러나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맡기고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며 파리 여행 일정을 짜는 호사라니.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다. 공기 속에 솜사탕 가락들이 날아다니는 듯 모든 숨이 달콤했다. 아, 이제야 실감이 난다. 마음이 놓인다. 나의 여행이 시작됐다.



20240530_204631.jpg 이번 여행 동안 읽을 책은 <닥터 지바고>, 휴- 쉽지 않다


세 번의 기내식을 먹고, 영화를 감상하고, 책도 읽고, 닌텐도 동물의 숲 게임을 하고, 잠도 자고, 일기도 쓰고, 노래도 감상하며 비행시간을 즐겼다. 시시때때로 화장실 근처 가벽 뒤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마지막 기내식을 먹을 즈음엔 콘텐츠 목록에서 발견한 방탄소년단 콘서트도 감상했다. 13시간이면 하루 중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넘기고도 남는다. 이건 마치 캡슐호텔에서 완벽한 휴일을 보내는 기분이다.



20240530_233402.jpg 하늘에서 바라본 프랑스의 들판


어느덧 구름 아래로 비행고도가 낮아졌다. 야트막한 동산들과 경계가 둥글둥글한 경작지들이 보였다. 비닐하우스는 거의 없었다. 마치 퀼트 원단처럼 조각조각 다른 톤의 녹색을 띤 경작지가 이어진 것이 우리나라 논밭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20240531_010457.jpg 여러 가지 톤의 녹색이 조각조각 이어지는 프랑스의 농경지 풍경


공항에 도착하자 샹송이 흘러나왔다. 정말 프랑스에 도착했나 보다. 한 치 앞도 모르겠는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당장 짐 찾고 입국 수속 밟는 것도 걱정이다. 일단 우르르 이동하는 다른 승객들을 따라갔다. 생각보다 많이 걸어야 해서 당황했지만, 웬 전철 승강장이 나와서 더더욱 당황했지만, 눈치껏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한국인 가족을 따라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전철은 샤를 드골 공항이 워낙 규모가 커서 각 터미널을 연결하기 위해 운영하는 공항 셔틀 무인 전철이었다.


전철에서 내린 뒤 계속 이동하면서 서둘러 포켓 와이파이와 휴대전화를 켜고 남편에게 생존 신고를 한 뒤 친구에게 연락했다. 이히의 남편이 이미 출국장에 마중 나와 계시다고 했다. 현지의 죽마고우라니, 이렇게 든든할 수가!


입국심사로 향하는 길목마다 공항 직원들이 삼삼오오 서 있었다.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인사해 주는데, 아이가 된 것마냥 쑥스럽고 기뻤다. 마주치게 되는 공항 직원 중에는 누가 봐도 한국 문화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게 느껴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첫인상은 한국에 대한 호감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보다 유색인종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인상은 프랑스를 여행하는 내내 이어졌다.


드디어 기나긴 입국 과정을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저녁 6시가 훌쩍 넘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해가 뉘엿한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큰 키에 목까지 길게 빼고 기다리고 있는 친구의 남편이 보였다. 후아, 살았다. 프랑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안도감이 온몸을 휩싸고 돌았다. 형부와 함께 차를 타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희원이네 집으로 향했다.

keyword
월, 목 연재
이전 04화출발 1_출발, 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