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출국 날이 되었다. 지난 7개월 동안 얼마나 기대해 왔던가. 여행을 떠나는 마음이 얼마나 벅차고 설렐지 고이고이 상상해 왔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꿈꿔온 것과 좀 달랐다. 좋긴 좋은데, 뭔가 생각보다 술술 풀리지 않는 느낌이랄까. 만나는 사람마다 프랑스 여행을 앞둬서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네, 너무 기대되고 기분 좋은데, 이상하게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일주일 넘게 자리를 비울 것에 대비해 업무를 정리하느라 여행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바빴다. 과연 이 정도면 괜찮을지, 대직자가 커버하기 어려운 업무에서 일이 터지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팀원들에게 한국 시각으로 15시부터 카카오톡으로 연락 가능할 거라고 신신당부를 해놨다. 그래도 제발 연락이 오지 않기를.
여행 전날에는 시차 적응을 위해 잠을 적게 자고 비행기 타자마자 잠드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겸사겸사 늦은 새벽까지 짐을 쌌다. 이즈음이면 부푼 마음으로 느긋하게 짐 싸기를 마무리 지을 줄 알았는데, 성인 ADHD마냥 눈 가는 곳마다 챙길 것투성이라 혼돈의 카오스였다. 한두 달 전부터 미리 준비물 체크리스트를 상세히 써놓길 잘했다, 잘했어. 안 그랬으면 몇 개씩 빼먹을 뻔했다. 이 아슬아슬한 느낌.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마저도 긴장했는지 꽤 설쳤지만, 쪽잠이나마 2시간 정도 잘 수 있었다.
공항버스는 오전 6시경 출발 예정이다.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정류장까지 캐리어를 끌고 걸어갔다. 아니 그런데 분명 짐 쌀 때는 공간이 여유롭기만 하던 캐리어가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살면서 끌어본 짐 중에 가장 무거웠다. 웬만한 힘으론 밀리지 않아서 양손으로 밀고 다리로 힘을 보태며 부지런히 걸었다. 이걸 끌고 프랑스 파리에 간단 말이지, 이 내가? 현실감이 없다. 손목, 발목, 허리 다 아프고 벌써 덥고 힘들다. 잔 듯 만 듯 눈알은 뻑뻑하고 미간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나에게 오전 6시 전이란 무척 이른 시간이었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밝고 활기찼다.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산책 나온 어르신들은 이미 한 바퀴 다 도시고 벤치에 느긋하게 앉아 낑낑대며 지나가는 나를 구경했다. 하루를 이렇게 빨리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벌써 줄이 길다. 이른 아침부터 공항에 가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다들 어디 가시나요. 전 혼자 프랑스 갑니다. 인터넷으로 공항버스 정류장을 알아보다 우연히 동네 사람의 글을 봤는데, 좌석을 반드시 미리 예매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이걸 못 봤더라면, 공항버스도 비행기도 놓칠 뻔했다. 긴 여행을 앞두고 느슨해지려던 마음이 살짝 서늘해졌다. 버스 예매 안 했으면 어쩔 뻔.
버스 짐칸에 커다란 캐리어를 실으며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은 무게에 당황했다. 이걸 끌고 먼 길 갈 수 있는 거겠지? 온몸으로 낑낑대며 캐리어를 밀어넣고 버스에 올랐다. 후아, 오랜만에 타는 공항버스다. 서늘한 새벽 공기에 볼은 차갑고, 캐리어와 씨름하느라 등은 후끈하다. 엉거주춤 좌석에 앉는데, 공기도 낯설고 아무튼 편안하지가 않다. 이 기분이 여행의 시작인가? 설렘보다는 긴장과 피로의 연속이라 뭔가 불안했던 여행의 시작.
멍하니 창밖으로 익숙한 길이 낯선 풍경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공항 가는 길이 머네. 깜빡 잠이 들 뻔했다. 밤에는 마저 짐을 싸느라, 새벽엔 버스 시간에 맞춰 부랴부랴 준비하느라 참으로 부산스러운 출발이었다. 13시간이 넘는 기나긴 비행시간을 앞두고 있으니 잠을 아껴야지.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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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하고 수화물을 접수했다. 버스에 캐리어를 실으며 남다른 무게에 흠칫했던 느낌은 역시나였다. 수화물 기본 무게를 초과하여 추가 요금을 내야 했다. 친구네 세 아이 간식을 잔뜩 챙기고, 더위와 추위에 모두 대비해 옷도 많이 챙겼는데, 그 탓인 듯했다. 돌아올 땐 더 무거워져 있을 텐데, 괜찮으려나. 또 한 번 마음이 오소소 해진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으로 포켓와이파이를 대여하려는데, 대여 장소가 상당히 멀다. 그 다음엔 희원이가 부탁한 한국 관광안내 책자를 받으러 관광 안내 데스크를 들렀는데, 아무리 리플릿 사진을 보여줘도 아는 직원이 없다.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해 보니 지금은 더 이상 배부하지 않는 과거 자료란다. 시간이 꽤 지체됐다. 이건 포기해야겠다.
서둘러 탑승수속을 밟으러 가는데, 발바닥에 땀이 난다. 나 뭐 잊은 거 없겠지? 여행 전 며칠 동안 정신없이 지내느라 더 꼼꼼히 준비물을 챙기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나는 매번 이런다. 꼼꼼하게 더블 체크하는 일을 잘 못 하겠다니까. 그래도 어찌어찌 되겠지? 되려나..?
모든 절차를 무사히 거치고 탑승 게이트 앞에 도착해서야 한숨을 돌렸다. 여긴 앞으로도 뒤로도 함부로 나아갈 수 없는 특별한 곳이다. 이 옴짝달싹할 수 없음에 기대어 가만히 숨을 골랐다.
오전 내내 어깨를 무겁게 누르던 배낭을 잠시 내려놓았다. 비행시간 동안 놀거리를 잔뜩 챙겨와 가지고 어지간히 무겁다. 막간을 활용해 보조 배터리를 충전하며 드넓은 활주로로 시선을 던졌다. 내 옆자리엔 누가 앉게 될까. 이왕이면 여자였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