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마음먹다
어느 정도의 강하고 뚜렷한 마음이어야 워킹맘이 일도 아이도 뒤로 제치고 혼자 프랑스로 여행 떠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세상 게을러서 여행도 잘 안 다니는 나 같은 사람이.
어쩌다 보니 그날이 왔다. 서늘한 가을밤이었다. 이어지는 야근에 날이 갈수록 몸은 퍼석퍼석, 정신은 해롱해롱해지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일을 해도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막막한 마음에 A4용지 박스에 업무 서류를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 잦았다. 그날도 그랬다.
녹초가 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오니 내 마음은 바쁜데 세상은 한적한 밤이었다. 거실에는 먼저 귀가한 남편이 아이를 재우고 고요히 육퇴의 여유를 누리며 쉬고 있었다. 우리 둘 말고는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으니, 내가 야근이면 육아는 오롯이 남편의 몫이다.
식탁 위에 서류가 담긴 박스를 털썩 내려놓았다. 하루종일 형광등 밝은 빛 아래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눈이 피로에 절었다. 뻑뻑한 그 감각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아 주황빛 조명을 켰다. 식탁 위에 가져온 서류들을 잔뜩 벌여놓고 노트북을 펼쳐 일을 쳐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나니 눈은 뜨고 있지만 머리는 잠든 상태가 되었다. 해도 해도 까마득한 느낌. 화가 치밀어올랐다. 절망감이니 회의감이니 무력감이니 하는 온갖 것들이 몰려왔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 건지, 언제까지 이러고 지내야 하는 건지, 나아지긴 할 건지.
“오빠, 나 프랑스 갈 거야.”
다짜고짜 남편에게 선언했다.
"응?" 남편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오빠, 우리 결혼 전에 말이야. 10년 내에 나 혼자 프랑스 여행 갈 거라고 했던 거 기억하지? 그거 갈 거야.”
남편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겐 언젠가는 혼자서 프랑스 여행을 가겠다는 오래 묵은 마음이 있었고, 지금은 한창 분노로 해까닥 도는 중이었으니까.
결혼 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패키지 여행을 다녀왔었다. 여행 초보인 우리 가족의 수준에 맞춰 가장 널널한 일정의 여행으로 고르고 골랐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표 패키지 여행이었다. 9박 10일 동안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3개국을 도는 놀라운 일정!
매일같이 꽉 찬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새벽기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유명 관광지를 줄줄이 눈도장 찍으러 다녔다. 시선 닿는 곳마다 예술작품들이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가 펼쳐졌다. 인생 첫 유럽이라는 설렘과 흥분으로 긴 이동시간의 피곤함도 가뿐히 이겨냈다.
다만 어디든 도착하자마자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너무 아쉬웠다. 모든 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일텐데, 이렇게 튀기듯이 지나가야 하다니. 내 인생에 여길 다시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단 말이다.
정점은 프랑스에서 루브르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우리 여행의 가이드는 이곳의 대표작인 ‘모나리자’, ‘니케’, ‘밀로의 비너스’ 3개 작품만 보면 된다며, 모두의 멱살을 잡고 1시간 만에 루브르를 돌파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그나마 1시간이라도 눈팅할 수 있었던 루브르는 양반이었다.
식사 장소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가이드가 말했다.
“여러분, 옆에 보이는 건물이 오르세 미술관이고요, 강 건너편에는 오랑주리가 있답니다. 아쉽게도 우리 일정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건물이라도 보세요.”
그 순간 결심했다. 무조건 파리에 다시 올 것이라고. 다시 파리에 와서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을 원 없이 실컷 구경할 것이라고.
“뭐야, 나도 같이 가.” 남편이 말했다.
“나 미술관만 갈 건데, 같이 갈 거야?”
“아니. 그림은 책으로 보면 되지, 뭐 하러 프랑스까지 가. 됐고 혼자 갔다 와.”
내 남편이지만 참으로 무던하다.
“근데 무슨 돈으로 다녀오려고?”
“응, 나 언젠가 프랑스 여행 비행깃값으로 쓸 거라고 코로나 때 대한항공 주식 사뒀었잖아. 그리고 이히네서 잘 거야. 비행깃값이랑 숙박비가 안 들어.”
“아, 그 주식이랑 이히네…. 그래, 알겠어.”
이히는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는 친구다. 날 좋은 5월이나 6월 초쯤 놀러 오라고, 재워주겠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마침, 다음 해 7월에는 파리 올림픽도 있을 예정이었다.
행여나 남편이 마음을 바꿀세라 이야기 나온 김에 몇 가지를 고려해서 바로 날짜를 잡았다. 5월은 가족과의 시간에 집중하기. 연차 일수를 아끼기 위해 주말과 현충일 휴일을 끼고 다녀오기. 여행 동안 밀린 업무를 정리할 수 있도록 최소 주말 하루는 남기기.
현충일이 우리나라에서는 휴일이지만 프랑스에서는 평일인지라, 현충일에 프랑스에서 출발한다면 저렴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오케이, 돌아오는 날짜는 정해졌다. 그럼, 언제 출발할 것인가. 며칠 다녀올 것인가. 오롯이 육아를 전담해야 할 남편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양심과 욕심이 적당히 타협하여 7박 9일 동안 다녀오기로 했다. 앉은 자리에서 비행기 예약까지 끝내버렸다.
좌석도 미리 잡았다. 실컷 하늘을 구경해야 하니 창가 자리여야 한다. 기나긴 비행시간도 오롯이 달콤한 나만의 자유시간일 테니, 조금이라도 더 편한 자리여야 한다. 3인석 창가 좌석 중에 비행기가 가늘어지는 꼬리쪽 맨 뒤 좌석만 2인석이었다. 다른 자리보다 창문과 좌석 사이가 약간 더 넓어 그나마 덜 답답한 자리란다. 심지어 화장실도 가깝다. 오케이, 이 자린 제겁니다. 신나게 항공권과 좌석을 알아보고 있는데, 남편이 묵직하게 한 마디 던졌다.
“그런데 너가 정말 여행을 갈 줄은 몰랐어.”
미안, 그리고 고마워.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