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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희 Jul 12. 2019

날개 없는 천사

선한 날개를 접고 있는 그대에게

봄 햇살이 따스했던 금요일 오후 용산역.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늦은 오후가 아니어서 당연히 기차표가 있겠거니 했는데... 이런 온통 매진이다. 누군가 취소하는 차표를 겨우 구했는데 2시간 후였다. 갈 곳이 필요한 나는 카페로 갔다. 카페 역시 빈자리 없이 빼곡했다. 불금은 한낮부터 시작되나 보다. 창가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마다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 카페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은 일본인이었고, 뒤편에 앉은 사람들은 러시아 사람 같았다. 당연히 목소리는 들리나 말은 들리지 않으니 컴퓨터를 열어 작업을 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비어있던 옆 테이블에 4명의 여자들이 앉았다. 커피와 디저트를 시킨 그녀들은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듣고 싶었던 건 아닌데 좌석이 너무 가깝기도 하고 무엇보다 한국말이라 너무 잘 들렸다. 사실은 듣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 이야기가 들려 정보성을 띈 라디오처럼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이어폰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것도 없었고, 휴대전화 배터리도 여유가 없었다. 낭패다. 본의 아니게 옆집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야기는 정치 얘기며 집값 얘기며 다양했다. 대화는 한분이 주도하고 있었다.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대화의 소재로 보아 나이가 가늠되었다. 50대다. 사회경험이 제법 많아 보이는 여자 어른의 목소리가 많이 들려왔고 나머지는 고개만 끄덕이는 분위기다. 청중의 리액션에 신이 난 주인공은 말에 힘이 실렸는지 거의 혼자 이야기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어떤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 셋이 조금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말을 재미있게 하는 분이기는 했지만 어느 자리든 한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지는 대화는 건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어느 사이를 틈타 마침내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집중해 듣지 않으려 애썼던 탓에 앞뒤는 들리지 않았지만 이 한 문장이 귀에 꽂혔다.     


“요즘은 식당에 가서 아주머니들이 서빙을 해주면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긋했다. 보통사람들이 하지 않는 남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는 분명 사람의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천사의 마음을 가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들어 천사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엄청난 공감을 표현한 그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의 추측으로는 결혼을 해 살림을 10년 이상 해본 40대 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지 않고 살림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기 힘이 들것이다. 물론 결혼하고 살림했어도 당신은 당신의 일, 나는 나의 일이라며 전혀 공통점이 보이지 않고, 수고로움도 보이지 않았을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수없이 가는 카페와 식당에서 받는 서비스를 두고 비용을 지불한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없다. 고마움이 없다. 그러니 작은 배려와 친절이 오갈 리 만무하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소문난 맛집으로 지인분과 식사를 갔는데, 늘 그렇듯 식당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몹시 붐볐다. 음식은 맛있었고 추가의 반찬을 부탁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반찬 좀 더 주실 수 있을까요?”

홀 서빙을 하는 친구는 기꺼이 그러 마하고 대답을 했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그런 말 하지 마요. 죄송하다는 왜 해? 내가 내 돈 주고 밥 먹으러 왔으면 그 사람들은 서비스를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왜 죄송하다는 말을 해? 난 그런 거 싫어. 그냥 당당하게 말해요!”     

나이가 제법 있는 장부 기질을 지녔던 어르신은 나를 꾸짖었다. 당황스러웠다.

설명을 듣고도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가 안 갔다. 저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그분의 조언이 내게는 몹시도 불편했다. 내 귀에는 손님은 갑질을 해도 된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화통함과 당당함이 그분의 매력이기는 했지만 내가 감당하기엔 버거웠다. 나이라도 나보다 어린 사람이면 내 의견을 말하고 가르치기라도 했을 텐데, 나보다 한참 어른인 그분에게는 안 될 일이었다. 그 후, 결이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힘든 일이어서 차츰 거리가 멀어져 지금은 연락조차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이 다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하지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먼저 존중하고 배려해야 나도 존중받고 배려받을 수 있다.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공감의 시작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이제 ‘나 자신’이 중요한 것을 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중요해.’라고 말하곤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있는 듯하다.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만 제일 중요해.’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안타깝다.      


프랑스는 아름다운 개인주의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나라라고 한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음식을 같이 시켜 나누어 먹는 게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들은 시켜놓은 음식을 나누어 먹거나 바꾸어 먹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시켜놓고 상대가 주문한 음식이 아무리 맛있고 좋아 보여도 다음에 그 음식을 주문해 먹기를 선택하고 지금은 내가 선택한 음식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도도하고 아름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자꾸 엉키려 하고,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제하기도 하며, 강요하기도 한다. 우리가 아름다우려면 당신이 아름다운 채로, 또 내가 아름다운 채로 존재하며 함께 있을 때여야 한다.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내 기준으로 누군가를 들이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남의 것을 너무 내 것처럼 하려 하지 말고, 바라봐주며, 그 마음은 공감하되 선을 넘지 않는 것.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으며 내가 갑이라고 생각해 힘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 덕분에 내가 좀 더 편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음에 고마워하고, 피곤할 수도 있을 그 상황을 배려해 주는 것 말이다. 

지금도 궁금한 건 상냥했던 말투를 가진 천사의 얼굴. 분명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얼굴이었을 거란 확신이 드는 것은 왜일까.     


BGM_유리상자_아름다운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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