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러너다
나는 러너다.
나는 매일 소염제를 먹고 달리는 러너다.
척추 전방전위, 퇴행성 척추관 협착으로 소염제 없이는 하루를 걷는 것조차 나에겐 고역이다.
그런 내가 달리는 러너가 되었다.
물론 퇴근 후 러닝을 나간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잘 알고 있기에 퇴근 후 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나약함을 태워버리기 위한 나의 방편이다.
그렇게 10개월을 넘도록 '일일 러닝'을 이어왔고, 마라톤 대회 메달이 벌써 3개나 된다.
"언니, 다이어트 목적이라면 동참할게요. 그런데 걷기 라면 모를까 뛴다고? 내가? 말도 안돼요."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거리면 건너갈 자신이 없는 나는 부러 천천히 걸어 건널목 앞에서 대기한다.
다음 신호가 돌아올 때까지.
매일 SNS에서 인증을 해야 하는 온라인 크루에 가입하자는 친한 언니의 권유로 '다이어트나 해볼까.' 싶어 못 이기는 척 동참하기에 이르렀다.
천천히 걷기와 보통속도 걷기를 시작으로 인터벌 방식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훈련은 점차 달리기로 접어들었고, 1분 달리기와 천천히 2분 걷기를 반복하는데 어느새 1분을 달리니 4분도 달릴 수 있게 되고, 7분을 달리게 되더니 30분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제법 뚱뚱한 아줌마인 내가 뒤뚱 거리더라도 30분을 달리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순간 내 머리 위에서 터지던 팝콘 같던 폭죽은.
희열에 찬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운동장에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호! 된다! 나도 뛴다!"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는 학생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거기서 뿜어내지 않으면 안에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꽃바람 살랑이는 3월에 있을 마라톤을 대비해 특훈에 들어갔다. 30분이 다시 1시간이 되어야 적어도 10KM를 달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갑작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3월에 있을 마라톤 대회가 2월로 앞당겨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왕에 달리기로 한 거 2월이면 어떻고 3월이면 어떠하리.
대회장은 아직 녹지 않은 얼음 꽃들이 주황색 트랙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차가운 공기에 볼이 시려오고 눈 녹음으로 운동화는 벌써 질퍽하게 물이 들고 있었다. 다 상관없었다. 기대에 찬 표정의 러너들과 하얗게 피워내는 입김 속에서 우리는 서로 열정을 다잡고 있었다.
"10KM 선수분들 자, 출발!" 덜컥 등을 밀어주는 출발 신호에 순간 움찔했지만, "파이팅!"을 외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달리고 있었다.
5KM 반환점을 돌고 그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옆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표정도 보고 길가에서 줄지어 응원을 하는 사람들과 손바닥도 마주치며 제법 대회를 즐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웃음이 났다.
정작 러닝으로 다이어트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러닝 후 허기짐을 달래기 위한 양질의 식사가 점점 튼튼한 러너를 육성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뒤뚱 달리기를 시전하고 목전에 피니쉬가 보여 영혼까지 끌어모아 전력질주로 통과했다.
첫 대회 기록은 1시간 17분 57초!
나는 달렸다. 그리고 해냈다. 온갖 문학적, 철학적 구절들이 머리를 스쳤다.
'하고자 하면, 된다. 온 우주가 너를 응원한다. 차근차근 성실히 해나가면 반드시 이룬다'
내 아들들에게도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 "엄마도 안될 거라 생각했는데, 1분 달리고 4분 달리니 30분도 달리고 1시간도 달릴 수 있더라. 너희들도 못할 게 뭐가 있겠니!" 아이들에게 어떤 뉘앙스로 전달될지는 모르겠지만 꼭 하리라!
지금은 3시간을 내리 달릴 수 있는 나는 러너다.
불과 6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은 척추 통증마저 이겨낸 러너였다.
6일 전 극심한 스트레스와 감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치열한 전투 끝에 항복하고는 내과로 내원했다. 혈압이 자그마치 수축기 204mmHg.
당장 응급실로 향하라는 의사의 권고로 동네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218mmHg. 심장내과가 있는 큰 종합병원으로 옮기라는 말에 발을 돌려 제주한라병원으로 갔더니 이번에는 수축기 233mmHg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런 증상이 없는 것이 더 문제였다.
두통도, 어지럼증도, 구토도, 시야 흐림도 없는 단순 목감기 환자라 생각했는데 초고혈압이라니. 그때까지만 해도 이틀 뒤 있을 마라톤대회에 못 나갈 수도 있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다.
뇌 CT검사 결과가 문제였다. '뇌동맥류' 의심 소견. 아주 작은 뽈록이. 지깟게 무얼 할 수 있겠나 싶었는데 그 녀석 아주 대단한 걸 해냈다.
"앞으로 러닝 금지야!"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권고에 "에이~ 장난하지 말고~" 설마 하는 마음에 온갖 아양을 떨어보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단호했다. '이런 젠장' 이대로 달리다가는 언제 어디서 쓰러져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한다는 말에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우선은 혈압의 안정이 먼저였다. 심장내과에서 검사를 했는데 '고지혈증' 진단 외에 별다르게 나온 병명은 없다. 당분간 혈압약을 쓰면서 혈압을 안정화시킬 계획이라는 의사 선생님께서 한마디 더 붙이시길 "운동도 안됩니다. 혈압이 180까지 나온 분들은 가볍게 움직이시라 권고하긴 하는데..." 선생님의 말을 얼른 끊었다. "그럼 저도 가볍게... 는 되죠? 혹시 마라..." 마라톤이라는 단어를 다 꺼내지도 못했는데 선생님께서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절대 안 됩니다! 큰일 나요!"
러닝은 나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마법과도 같은 선물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차 '컥컥'하고 가쁘게 내뱉으면서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내 자신이 한 겹 더 새롭게, 또 한 겹 더 강하게 태어나는 것 같아 '달릴 수 있음에 감사'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러닝은 단순히 내게 운동이 아니라 내 마음의
'치유'이자 '회복'
인 셈이다.
당장은 내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할 때라 잠시 쉬어가지만, 기필코 다시 달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시의 바람을 가르며 달려 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내 안의 나를 마주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며 걷는다.
오늘의 걸음이 곧 내일의 러닝이 되어 벅찬 환희와 설렘을 만끽할 수 있도록 준비 걷기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