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46. 20190910

by 전영웅

제주는 비가 많이 왔다. 링링이라는 귀여운 이름의 태풍도 무섭게 지나갔다. 태풍이 지나가고 난 후에도 흐리고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아침은 반갑게도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났다. 예보는 오늘까지 비가 온다고 했는데 말이다. 햇살이 제일 반가운 건 라이였다. 녀석은 어제도 잠깐 보인 햇살에 바로 몸을 누이다가 다시 흐려지자 집으로 들어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내리쬐는 햇살에 아예 마당을 제 안방으로 생각하고 드러누워 버렸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데다 태풍까지 지나가니 텃밭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고추나 가지들은 다 기울고, 생강 줄기는 꺾여버렸다. 그런 것들은 그저 다시 세워주면 되는데, 이제 막 심은 배추 모종은 거의 다 녹아버리다시피 했다. 솟아 난 무 싹들도 힘없이 꺾여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심어야 하는데, 시기가 좀 늦어지는 건 아닌가 해서 걱정이다. 그리고, 허브올레에서 사다가 3년 잘 자라던 레몬티트리 나무가 밑동에서 꺾여버렸다. 조금 귀하게 키우던 나무인데 그렇게 죽어버렸다. 무서운 자연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별 수 없이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혹시 새 순이 날까 뿌리는 그대로 두고, 가지는 넉넉히 잘라서 가지꽂이를 해 두었다. 뿌리가 나면 바로 옮겨 심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너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던 그 길이 생각난다. 거리상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고 다녀야만 하지만, 아침부터 날이 너무 더우니 차를 이용하지 않으면 힘든 등굣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차로 분주하던 그 길과 아침 먹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딤섬집의 풍경이 떠오른다. 이른 아침의 그 분주함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얼굴도 붓지 않고 매무새도 나름 정돈되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빠는 신기했다. 등교를 너무 일찍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아빠의 걱정과, 실제로 등교를 너무 빨리해서 힘들어하는 너를 비교하면 그 사람들은 너무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었다.


어제오늘 읽은 책에서 여행자란 그림자가 없는 존재라고 했다. 여기서 그림자란 사는 곳에서 내리는 뿌리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책임이나 의무 등등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여행자는 머무는 곳에서 많은 의미로 외떨어진 존재다. 아빠가 그러했다. 5일 남짓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아빠의 눈에 보이는 신기한 일상들은 아빠에게는 그저 바라보거나 감상하는 그런 종류의 풍경이었다. 너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잠깐의 일상을 경험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새롭고 신기한 경험의 하나였을 뿐이다. 대신 너는 이제 일 년을 넘기는 그곳의 생활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가며 그림자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너는 잠시 들르는 여행자가 아니기에, 그곳에서 남기는 그림자는 당연하다. 그 그림자가 일상의 근원이 되어, 너는 그곳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사귀고, 귀찮지만 공부도 하고 숙제도 한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외삼촌의 집에서 사촌남매들과 부대끼며 살고 있다. 그림자가 생긴 만큼, 너의 기억과 경험도 무거워질 것이다. 겨울에 그곳 생활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면, 그 무게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 너의 생활을 재밌게 즐기고, 소중하게 다루어라.


아빠는 고정된 한 자리를 지키며 일하는 직업인이고, 혼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집을 지켜야 하며 멀리 다닐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요즘에는 여행에 대한 소소한 생각들이 많아진다. 어디론가 무조건 떠나고 싶다기보다는, 있던 자리를 떠나 어딘가를 다니는 일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설렘 같은 것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너와 함께 있었던 지난 5일 동안의 그곳 생활이 떠올랐다. 집은 여전히 할 일이 넘치고 라이 녀석도 눈에 밟히지만, 그만큼 집 바깥의 어딘가에서 느낄 감정과 생각들이 막연히 그립다. 아무래도 네가 집으로 돌아오면 좀 나아질까? 편지를 마무리하고 아빠는 배추 모종을 심으러 텃밭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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