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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제나 Oct 20. 2023

12. 온탕도 그 나름의 흐름이 있다

12. 온탕도 그 나름의 흐름이 있다


밥을 같이 먹다 보면 많은 걸 알 수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젓가락이 가는 횟수에 무슨 반찬을 좋아하는지, 주로 어떤 음식을 고르느냐에 따라 어떤 음식을 즐기는지. 심지어는 그 사람의 식사습관에서 그 사람의 삶도 알 수 있다. 


혜영이는 어렸을 때부터 밥에 단 건 싫어, 밥은 밥다웠으면 해.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콩밥, 밤밥을 싫어했다. 밥에 섞어도 용서할 수 있는 건 콩나물밥, 곤드레나물밥뿐이라나. 콩밥에 콩을 남기지 못하게, 다 먹이려고 하자 혜영이는 콩을 혀 밑에 숨겨두고 양치하러 가서 변기에 콩만 뱉어내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다. 그런 아이였다. 눈앞에서 내 앞에서 반발하지 못해도, 자신이 싫거나 불편한 구석이 있으면 혼자서 조용히 처리하던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불편한 구석이 있으면 티가 나곤 했다. 자기는 티가 난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사실 스스로 모르는 게 더 신기할 정도로 투명하다)


요즘 혜영이랑 밥을 먹는 일이 잦아졌다. 혜영이가 친구들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혜영이는 변하지 않았다. 미주알고주알 먹고 싶은 것을 이것저것 말하던 입은 닫혔고,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며 맛있는 음식점에 가도 배를 채울 만큼만 먹고 그 이상 먹지 않았다. 말로는 백수가 체질이라며, 웃어넘기던 혜영이는 불안한 거다. 한 번도 쉬어보지 못했으니 그럴만하다. 쉬어도 된다고, 쉬어가라고 그렇게 말을 했으나 와닿지 않나 보다. 


나는 5시에 깨 여유롭게 소파에서 TV를 틀어두고 앉아있었다. 혜영이가 7시쯤 TV 소리를 듣고 일어나 거실을 한번 보고는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다. 그럼 나는 한동안 나가지 않은 혜영이에게 오늘 우리 어디 가볼까 하며 묻고는 눈치를 살핀다. 나랑 혜영이는 자주 근처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을 찾아가 목욕을 하러 간다. 어차피 목욕을 하러 가기 때문에 세수 정도만 하고 바로 외출이 가능하다.


가는 길에 빵집이나 김밥에 들러 간단히 먹을 것을 가면서 먹고, 온천으로 간다. 온천으로 가는 길에는 오래간만에 차에서 노래를 듣는다. 나는 차에서 노래를 잘 듣지 않는 편이지만, 혜영이는 차를 탈 때마다 노래를 틀어두는 편이다. 집에서 TV를 틀어두는 편인 나와, 집에서 자기가 보지 않으면 TV를 꺼두는 혜영이와 정반대이다. 오래간만에 혜영이가 트는 노래를 들으며 길을 나선다.


혜영이가 요물요물 이야기를 해준다. 이 노래는 요즘 유행인데, 들어봤냐 던 지 혹은 내가 알만한 큰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나온 신인이라던지 하는 이야기다. 혜영이의 이야기가 잦아들 때쯤 무얼 하나 보면, 이따 나와서 무얼 먹을지 휴대폰으로 찾아보고 있다. 혜영이는 미식가는 확실히 아니다. 뭘 해줘도 그냥 무난하게 잘 먹는다. 맛이 없으면 맛이 없다고 말하면서 잘 먹는다. 그런데 꼭 이런 곳을 오면 맛있는 집을 잘 찾는다. 옆에서 나에게 “오늘은 한식이 당겨? 아니면 중식? 이 집이 어디 방송에 나왔다던데 가볼까?” 하며 물어본다. 그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금방 목적지에 도착한다.


혜영이랑은 어렸을 때부터 목욕탕을 자주 왔다. 이렇게 멀리 물 좋은 곳으로 소문나지 않았어도 동네 목욕탕도 자주 가곤 했다. 혜영이가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에 살기 시작하며, 내 차 뒤에 실어둔 목욕바구니에 혜영이의 물품은 없지만 말이다. 목욕바구니에는 여러 가지 샘플들이 많이 담겨있다. 화장품을 살 때 챙겨주는 샘플들은 작고, 간단해 이렇게 온천 같은 곳을 올 때 쓰면 유용하다. 혜영이와 씻고 난 뒤, 탕으로 들어갔다.


온탕이다. 처음에는 애매한 온도의 온탕부터 시작해야 한다. 38.8도. 실시간으로 측정되는 온도계를 보며, 무시하고 들어가면 오래 있을 수 없다. 혜영이는 뜨거운 건 잘 참지만, 습기로 숨쉬기 힘들어하는 걸 참기 힘들어한다. 온탕에 둘이 몸을 담그다 나는 습기 사우나로 들어간다. 혜영이는 매번 같이 들어오지만, 결국 10분 만에 백기를 들고나가곤 한다. 


혜영이와 나에게 온탕은 마치 신부님의 고해성사실 같은 곳이다. 각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며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마음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꺼내곤 한다. 여기서 많은 혜영이의 실수들을 고백받았다.


사소하게는 시험을 못 봤다는 이야기부터, 사실 친한 친구와 싸워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온탕에서 들을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모든 일이 가끔은 분위기에 휩쓸려 풀리는 경우가 있다. 따뜻한 물에 몸의 긴장감이 풀려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옷을 다 벗은 채로 물 안에 들어가 서로만 있다는 게 편안해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탕 안에 들어갈 때는 불문율처럼 아는 사이가 아니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기도 했다. 목욕탕 특유의 타일에서 반사되는 듯한 우우웅하는 소리가 안정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정확하게 모르지만, 알 것 같기도 한 이유들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털어두곤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가 된다고 해서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수업에서 큰 실수를 하여 창피하기도 하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멀어지기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건, 사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속에서 알 수 없는 기포들이 올라와 공기 근처로 떠올라 사라지듯이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올라 입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혜영이의 머릿속에서 취직을 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왔다.


37.7도. 실시간 측정되는 온도계가 지금 온탕의 열기가 식었다고 말해준다. 여길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오더니 온도계를 보고는 위층으로 올라간다. 온탕에 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몸을 담그고 있는 곳보다 뜨거운 온도의 물이 나온다. 물에서 김이 나온다. 그 수증기가 혜영이와 내 사이에 가득한 순간을 틈타 혜영이를 쳐다본다. 혜영이가 취직을 하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혜영이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니던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줄었을 때, 그리고 회사를 나왔을 때가 생각이나 조심스러웠다. 물이 멈추고, 수증기가 살짝 걷혔을 때 보인 혜영이의 눈빛이 빛났다. 그만두고 나왔을 때와 달리. 


더러운 물에 새 물을 추가한다고 물이 깨끗해지진 않겠지만, 괜히 온탕의 물이 깨끗해진 것 같았다. 38.8도. 다시 우리가 처음 들어왔던 온도계의 물 온도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도 원래대로 온탕의 물 위만 바라본다. 어딘가로 흐르는 바다도 아니지만, 온탕의 물도 그 나름대로의 흐름이 있다.


혜영이가 맛있다고 예전에 말했던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켰다. 혜영이는 또 적당히 먹더니 젓가락질이 성의 없어졌다. 뉴스에서는 초등학교 교사가 불합리함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 뉴스만 봐도 자꾸 불안해진다. 하지만 말없이 TV를 지켜보는 혜영이의 모습에 내 마음이 더 불안해진다.


어떻게 해야 너에게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쉬어도 괜찮다고.


“이번 겨울에 벳푸 온천 여행 가려고.”


혜영이가 퇴사를 결심하기 한 달 전, 나는 엄마와 같이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혜영이가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일본어를 몰라 헤맬 때마다, 혜영이와 왔더라면 근처 맛집을 꿰고 있었을 텐데. 혜영이와 왔더라면 추천해 줬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갑작스럽게 던진 제안에도 혜영이는 젓가락으로 야채들만 앞접시에 옮기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한번 더 던져야 한다.


“그때까지도 쉬고 있으면 같이 여행 가자. 그때 갔을 때 너 생각이 많이 났어.”


혜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묘한 긴장이 됐다. 천천히 쉬었으면 좋겠다,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난 혜영이가 행복하면 된다. 나의 의도는 혜영이에게 100퍼센트 전달될 수 있을까. 왜곡 없이.


“그전에는 일이 생겨야지. 그때까지 쉬어도 된다고 하면 어떡해”


혜영이가 웃었다. 혜영이와 내 사이에 침묵의 기간이 길었다.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서로에게 전달하기 어려워 말을 삼켰더니, 침묵만이 나와 혜영이 사이에 이어졌다. 왜곡되어 전달에 실패하더라도, 계속해서 내 마음을 전달하려는 시도. 그런 시도가 필요하다는 걸 다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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