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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온제나 Oct 20. 2023

11. 아이들은 비밀을 좋아한다

11. 아이들은 비밀을 좋아한다


수업 수강생 중 한 분이 아이를 데려왔다. 엄마 다리 뒤로 숨어 몇 살이냐고 묻는 어른들을 바라보며 작은 손가락을 있는 힘껏 펼쳐 5살이라고 알려주는 아이를 보니 혜영이 생각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데려왔다는 수강생의 사정을 이해 못 할 어른은 여기 없다. 모두 나랑 비슷한 나이 혹은 일찍 결혼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온 사람들이었다. 수강생의 얼굴을 보니 매우 어려 보였다. 아마 혜영이보다 한두 살 많을 것이었다. 사람은 중요한 선택에 따라 삶의 방향이 많이 바뀌기도 한다. 나도 지금의 혜영이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혜영이를 낳았다. 곤란한 하윤이 엄마의 얼굴 뒤로 아이의 얼굴도 곤란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윤이 선생님이 비밀 하나 알려줄까?”


아이들은 비밀을 좋아한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수강생들에게 작은 과제를 주고 아이를 본다. 아이는 엄마가 무언갈 열심히 하는 게 어색한지 자꾸 엄마의 옷소매를 붙들고 놓질 않는다. 작아도 커도 똑같나 보다. 엄마가 자기만을 바라봐주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은.


“엄마한테도 말하면 안 돼. 지켜줄 거지?”


하윤이 엄마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하윤이는 비밀이 궁금한지 엄마의 옷자락을 놓고 나를 따라왔다. 


“선생님 오늘 화장실 3번이나 갔다.”


아이들은 똥과 방귀를 참 좋아한다. 하윤이는 이내 어색한 표정을 거두고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러더니 자기도 비밀이 있다며 내 귀로 가까이 와서 오늘 수업시간에 방귀 뀌었다고 고백한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는 코를 손가락으로 막으며 놀란 표정을 짓는다. 하윤이와 비밀이 생겼다. 무얼 먹었는지 보다 화장실을 갔다 왔냐고 묻는 게 아이들에겐 더 즐거운 질문일 수도 있다.


하윤이와 귓속말을 하고 있는 틈에 내게 전화가 왔다. 혜영이었지만 나는 수업 중이라 받을 수 없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게 되면서 혜영이의 전화를 자주 거절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혜영이의 전화를 안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혜영이는 전화를 거절할 때마다 자주 짜증을 냈다. 학교를 간 혜영이를, 약속을 간 혜영이를 기다렸었다. 항상 기다리는 쪽은 나였는데, 요즘은 바뀌었다. 일을 간 나를, 혜영이가 집에서 기다린다.


하윤이 엄마가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냐며 하윤이에게 묻는다. 하윤이는 웃으며 아까는 쑥스러워 펼친 다섯 개의 손가락 중, 가장 긴 검지손가락을 펼쳐 입가에 가져다 댄다.


“어머, 하윤이랑 제 비밀이에요. 그렇지 하윤아?”


하윤이는 비밀을 들었을 때보다 엄마가 다시 자기 곁으로 왔다는 사실에 신나서 배꼽인사를 하고 떠난다. 하윤이 엄마가 감사하다며 목인사를 하고 하윤이 손을 잡고 나간다. 핸드폰을 보니, 혜영이의 부재중 전화 표시가 떠있지만 전화를 곧바로 걸지 않는다. 분명 혜영이는 언제 올 거냐고 묻기 때문일 것이다. 늦을 바에는 아무 연락 없이 바로 들어가는 게 낫다. 


급하게 혜영이가 문자로 부탁한 굴소스를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급하게 오느라 땀이 삐질삐질 났다. 씻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식탁 앞에 앉은 혜영이와 식탁 위 식은 음식을 보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도 씻고 오라고 말하며 음식이 든 접시를 레인지로 돌리는 혜영이었다. 


옷을 벗고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쏴아 쏟아진다. 물을 쐐면서도 밖에 혜영이가 또다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바깥소리에 집중한다. 레인지가 조리를 끝냈다는 ‘띵’ 소리가 들린다. 비누칠을 서두른다. 일을 시작하며 혜영이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혜영이를 가장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사실 식탁 앞에 앉아있던 건 나였다. 밥을 먹고 들어오는지 몰라, 해 놓은 음식을 접시에 담 두곤 혜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혜영이는 그래도 전화를 꼬박꼬박 받는 편이었다. 혹여라도 혜영이가 전화를 받아 저녁을 먹고 들어온다고 하면, 혜영이에게는 알겠다고 차분하게 대답해 놓고 괜히 음식을 한 것 같아 짜증이 났다. 나 혼자 먹는 거였으면 그냥 삶은 고구마를 먹고 말았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혜영이의 뾰로통한 표정도 이해가 된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식탁으로 가니, 뾰로통한 혜영이가 앉아서 아직 음식에 손도 안 대고 기다리고 있다. 아직 기분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나가서 사회생활이란 걸 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너무 맛있다.”


나는 혜영이의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배가 고프기도 했다. 강의는 몇 시간 동안 혼자 이야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쌍방향 소통이길 원하는 일방향 소통 같은 것. 마치 모녀 사이 같기도 하다. 맛있다고 이야기하며 어떻게 만들었는지 혜영이에게 묻는다. 혜영이는 음식을 입에 넣으며 표정이 풀린다. 신나서 이 레시피를 어디서 봤는지 이야기해 준다. 음식을 하고 기다린 사람에게 맛있다는 말만큼 기분이 풀리는 말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맛있었다.


“간장은 뭘로 썼어?”

“저기 싱크대 옆에 있던데?”

“저 서랍장 안에 있는 걸로 쓰지. 그게 양조간장이거든.”


혜영이의 표정이 찌푸려진다. 이렇게 아직 살림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급하게 덧붙인다.


“근데 진간장으로 하니까 더 맛있는 거 같기도 하네.”


혜영이도 다 알지만 넘어가준다는 듯이 표정을 푼다. 그러더니 금방 밝은 표정을 짓는다. 커도 똑같나 보다 엄마가 돌아오면 기쁜 마음은. 씻고 앉아 저녁을 같이 먹으며 오늘 수업시간에 온 하윤이 이야기를 해준다. 혜영이는 아이를 참 좋아한다. 혜영이는 자기는 아기들을 좋아하는데, 아이들이 낯을 가린다고 속상해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비법이 있어, 뭔지 알아?”


혜영이 눈이 빛난다. 아이들은 비밀을 참 좋아한다. 혜영이의 눈을 보니, 하윤이 엄마가 아니라 하윤이 생각이 자꾸 났다. 사실 혜영이는 하윤이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또래인데도 말이다.


“선생님 오늘 화장실 3번이나 갔다고 말하는 거야.”


혜영이는 웃음이 터져 말도 안 된다며 손을 저었다. 몸은 커도 내 눈에는 하윤이와 똑같아 보인다. 여전한가 보다. 비밀을 좋아하는 것은. 나는 진짜라며 하윤이가 한 수업시간에 방귀를 뀌었다는 고백도 혜영이에게 털어놓았다. 지금쯤이면 하윤이도 내 비밀을 하윤이 엄마에게 털어놓았겠지. 쌤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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