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끔 쓰는 이다솜 Jan 03. 2018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가

Essay


내게 글은 중요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소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모순에서 비롯된 치부까지도. 하지만, 글을 쓸 때 지키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좋은 글감이 된다고 해도, 당사자에게 상처를 준다면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직도 우리 부모님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내기 어렵다. 다만, 이렇게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성인이 되기 직전, 부모님의 삶을 객관화하기 시작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에 휩싸였다. 직접적인 계기는 부모님의 갈등이었다. 다행히 슬픔은 길지 않았다. 수많은 장점에도 불고하고 흠결을 지닌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됐고, 더 사랑하게 됐다. 아마도 태어났을 때부터 두 분에게 받은 사랑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아이를 낳을 나이가 되니 무한한 사랑을 주고, 몇 가지 결정적인 판단을 현명하게 내려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조금은 알게 됐다.


내 인생의 두 번째 객관화는 이십 대 중후반에 시작됐다.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첫 번째 객관화보다 훨씬 더 차근차근 진행됐는데도 충격이 컸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조숙했고, 사춘기도 남들보다 빠르고 무난하게 넘겼던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모르고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았다.


계기는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20대이기에 누릴 수 있는 크고 작은 특권을 즐기는 동안, 그는 마찬가지로 20대이기에 피할 수 없던 좌절 속에서 내 무심함과 ‘제멋대로’ 식의 사랑에 지쳐가고 있었다.


몇 년 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권태기가 왔다. 그에게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리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창문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너무 슬퍼 보였다. 두 눈에는 지긋지긋함과 무기력,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도대체 나의 어떤 점이 그를 이토록 힘겹게 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저 진심을 다해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였고,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하려고 노력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다행히 문제점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더디게 나아졌다. 어떤 점들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생각해보면, 객관화만큼 뼈아픈 통찰도 없다. 대상이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범주를 인간이나 사회라는 범주로 확장해도 고통스럽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대부분이 명과 암, 선과 악처럼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가치가 뒤죽박죽, 어지럽게 엉켜 있다.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거나 유쾌할 리 없다.


(중략)


2018년 1월


 책에 실린 글의 일부입니다.


* * * * *


브런치북 <우린 이토록 다르지만 사랑을 해>를 얇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브런치를 통해 글의 일부를 읽어도 좋지만, 책장에 두고 보아도 좋은 전문을 실었습니다. 연애보다는 사랑에 관한 글, 무엇보다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읽을 책을 찾고 있다면, 권해드려요. 언제나 사랑하세요. 2019년 11월.


부크크 서점으로 바로가기

네이버 책 정보로 바로가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