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내가 있는 곳의 위치와 명칭을 정리하느라 골치가 조금 아팠다. 흔히 한국에서 말하는 뉴욕은 맨해튼에 국한해서, 그중에서도 맨해튼 중심부를 지칭한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다. 뉴욕의 정확한 지리적 위치를 찾아봐야 할 동기가 한 번도 없었기에, 맨해튼을 맨해튼이라고 발음하던 시절부터 그렇게 여겼다. 맨해튼은 미국 동부 뉴욕주 뉴욕시의 다섯 개의 자치구(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스, 스태튼 아일랜드) 중 하나였다. 나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 아인쉬타인이 히틀러를 피해 망명한 곳, 저승사자 조 블랙이 육신을 빌려 쓰고 돌려준 뉴욕이 모두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맨해튼과 롱아일랜드는 각각 다른 곳이었다. 거기도 뉴욕주안에 들어가니 넓은 범위에서 뉴욕이라 불렀던 것일까. 뉴욕은 뉴욕주 전체를 때로는 뉴욕시 전체를 때로는 맨해튼만을 지칭하기도 했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서 사용하는 '뉴욕'이라는 말은 지리감이 조금 선명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맨해튼의 스카이 라인이 주는 대도시라는 이미지는, 크기에 있어서도 서울보다 열 배나 클 것 같지만 실상 맨해튼은 서울의 7분의 1 정도다.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를 합한 정도의 크기)
게다가, 내가 도착한 지역이 서울에서 출력해 간 맨해튼 여행 지도에 나오지 않았다. 길쭉한 고구마 같은 지형의 맨해튼은 대충 세 부분으로 위쪽(북쪽 Upper) 가운데(중심부 Mid) 아래쪽(남쪽 Down)으로 구역이 나눠져 있고, 내가 가져간 맨해튼의 여러 지역 지도를 합하니 고구마의 반쪽 정도라고 할까. 이를 테면, 뉴욕 지하철(MTA) 파란색 A 노선이 1역부터 207역까지 있다고 한다면, 145역 위로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가장 많이 나온 지도가 165역까지였다. 내가 처음 도착한 역은 181 역이었다. 여행 가이드 북이 맨해튼 전체의 모습을 '여섯 명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소개하고 있었다니. 나는 서울에서 북쪽에 살고 있는데 외국인을 위한 서울 가이드 북에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제대로 들어가 있을까. 갑자기 몹시 궁금해졌다.
뉴욕의 지하철은 어땠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 다 맞다고 말하겠다. 그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니 정말 내가 평소에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단어, '할많하않'이 바로 떠올랐다.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라고 원래 문장 전체로 말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의미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서 보이는 지하철 역 자체는 구경할 만한 곳이 꽤 있다. 내가 매일 이용한 A 트레인 181 역 앞에도 뉴욕 헤럴드 창시자의 이름을 붙인 아담한 공원(Bennett Park)이 있고, 공원 앞으로는고색창연한 옛 주택이 그림처럼 서있다. 뉴욕 출신인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1809~1849)의 작품에 나올 법한 분위기다. (에드거 엘런 포의 문학적 흔적이 있는 곳은 그리니치 빌리지다.)
허드슨 강의의 조지 워싱턴 브리지
맨해튼은 강으로 둘러싸인 섬인데 서쪽, 지도상으로 왼쪽이 허드슨 강이다. 영국의 탐험가 헨리 허드슨 (Henry Hudson, 1565~1611)이 1609년 경 네덜란드에 고용되어, 동양의 보물이라는 중국을 찾아 대양을 항해하다 맨해튼 남쪽 지금의 뉴욕항을 발견하다. 중국까지 닿으리라 믿으며 거슬러간 모든 강줄기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길 원했다는 헨리 허드슨, 비록 실종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으나 그의 이름은 영원히 흐르게 되었다. 내가 보름 동안 머문 맨해튼의 카브리니 (Carbrini). 지어 올린 지 백 년 된 아파트의 방에서 바로 이 허드슨 강이 보였다. 빌려 쓰는 방이 이른바 강뷰(River_View)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는 뉴요커 현지인 혜택이다. 창문에 가까이 붙어 서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강이 더 넓게 보이고, 강의 끝나는 지점에 다리의 끝이 약간 보였다. 오후에 도착하고 한 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에 다시 보니 그 다리의 끝에 조명이 들어와 반짝였다.
내가 뉴욕에서 처음으로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다리였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창문에서는 일부만 보이는 이 다리의 전체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고 그저께 내렸다는 눈이 아직도 그대로 쌓여있었다. 아파트 뒤로 돌아가 허드슨 강변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다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나 뉴욕의 2월은 서울보다 더 추운 듯이 느껴졌다. 강의 모습이 넓게 보일수록 다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도시에 흐르는 강바람의 느낌이 아니다 바닷바람 같았다. 조지 워싱턴 브리지(George Washington Bridge)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이름으로 지은 조지 워싱턴 다리가 수도 워싱턴이 아닌 뉴욕 맨해튼 북쪽에 있다니... 나중에 알았지만 미국 전역에 워싱턴이라는 지명이 300군데나 된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때 미국의 수도는 뉴욕이기도 했다고.
조지 워싱턴 다리는 요란한 장식 없이 회색의 철제를 지그재그로 엮은 듯했는데, 우아하고 단아한 미감을주었다. 여행에서는 예상 못한 대상과의 만남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인듯하다. 나는 며칠 후에 세기적 건축물이라는 '브루클린에 브리지'나 '맨해튼 브리지'도 가보았다. 그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다리는 도시의 스카이 라인과 완벽하게 어울리며 그림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나에게는 조지 워싱턴 브리지가 처음 가 본 뉴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축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