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
나는 뉴욕을 여행보다는 방문의 의미를 두어 이른바 '여행 계획'을 거의 세우지 않았다. 요즘은 어딜 가나 들고 다니는 전화기만 제대로 작동해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는 데다 ,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으니 거기서 얻는 정보가 더 나을 것이었다. 다만, 미술관은 예외였다. 나에게 뉴욕은 미술관이 있는 도시로서 의미가 컸다. 반드시 방문할 미술관으로 모마(뉴욕현대미술관 MOMA)와 휘트니 미술관을 넣어두두었다. 미술관 입장료도 무시 못하는 사항이기는 했다. 보통 30달러 정도이니 거리상 가까운 곳 세 군데만 들려도 100달러에 이른다. 우리 돈 10만 원에 가깝다.
미술관 입장료 예매를 물었을 때, '현지인' 뉴요커 멀더는 '예매하지 말라'라고 했다. 자신이 '뒷문'을 잘 알고 있단다. 뒷문? 아니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뇨? 나는 부정한 방법은 쓰고 싶지 않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멀더에게 뒷문의 의미는 어떤 곳이든 저렴하게 이용하는 방법이라는 뜻이었다. 한국어도 그렇고 외국어는 쉬운 말이 언제나 어렵다. '뒷문'이라고 한 것은 뉴욕 시민 혜택이었다. 뉴욕 시민권(IDNYC)이 있는 사람은 게스트 패스를 사용할 수 있다. 내가 가고 싶은 뉴욕의 미술관(박물관)은 보통 입장료가 30~35달러 정도 하는데, 나는 지인 찬스를 통해 5달러 이내로 입장이 가능했다.
미술관이자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경우는 규모를 (13만 제곱미터에 소장품 2백만 점) 보고는 '시간이 되면 보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의 대상으로 나는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보고 온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고, e더 메트(The MET)를 못 본다고 해도 크게 상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메트 박물관이 금요일 저녁 6시부터 무료입장이다. 또 멀더 부부는 주말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메트 박물관을 중심으로 휴식을 취한단다. 자연스럽게 동선이 맞아떨어져 메트부터 들리게 되었고, 금요일 저녁은 무료입장인 관계로 나는 당당히 '앞문'으로 들어갔다.
맨해튼 5번가 정문으로 들어서면, <나는 메트로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 패트릭 브릴리가 '웅장하다(the Grand Staircase)'고 말한 넓은 중앙 계단을 오르게 된다. 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런 건축의 모태가 되었을 만한 건축물을 많이 봐서 그런지 크기나 양식에 별 감흥은 없었다. 다만, 메트의 그랜드 중앙 계단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박물관 입장할 때 가방 뒤적거림을 당한 기분을 떨쳐버리기에는 완벽한 공간이다. (이물질(?) 탐지 기계를 세우면 안 되겠습니까?) 옛 베르사유 왕궁의 계단을 오른다고 상상하면 기분 전환이 된다.
저녁 약속 시간까지 1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어서 나는 18세기 유럽 회화 전시관만 돌아보기로 했다. 서울에 오는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이 사실 본편은 오지 않는다고 본다면 여기서는 본편_대표작을 접할 수 있겠지. 계단을 올라가 긴 복도를 따라가면서 수많은 방들이 나란히 있었다. (정말 많이도 갖다 놓았구나.) 전시관마다 벽지의 색이 달라서 자주 온다면 구분은 되겠다. 안내 책자에 전시관 위치와 번호까지 있었지만, 들어서면 어디가 어딘지 모를 방과 방 사이를 지나다가 <아이리스>를 보았다.
반 고흐, 아이리스 IRISES, 1890.
눈이 번쩍 뜨였다. 보라색 붓꽃이 청색으로 보인들, 배경이 분홍색이었는데 아이보리 색으로 보인들 그게 무슨 상관이랴. <아이리스>를 보자마자 고흐의 그림인 줄 알 수 있었다. 왜 내가 이 그림을 처음 봤을까.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나는 고흐의 꽃 그림에 몰아치는 감동을 느꼈다. 붓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아이리스'는 무려 1890년 작품인데, 마치 며칠 전에 그린듯하다. 갑자기 나는 반 고흐의 꽃은 <해바라기>가 대표작인줄 알고 있는 내 지식의 기원을 따지고 싶어졌다. 게다가 평생 모사품만 봐서 칙칙함 마저 느껴졌던 '해바라기'와 달리 <아이리스>는 밝고 환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품이 고흐가 죽기 얼마 전에 그린 것이라니. 그 사실도 놀라웠다.
반 고흐, 로즈 Roses, 1890
고흐의 <장미>도 처음 보았다. 졸린 기운은 사라지고 내 눈의 초점이 분명해졌다. 그림은 그냥 느낌으로 아는 것이다. 저 풍성한 장미꽃은 마치 오늘 화병에 넣은 것 같다. 19세기의 색감이 아니라 21세기 바로 지금 시대의 그림 아닌가. 자연스러움 그대로를 살려서 표현하려면, 재능도 재능이려니와 얼마나 많은 고뇌가 연습이 필요했을까. 나는 반 고흐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구나.
반 고흐, 서양협죽도 가지가 꽂힌 마졸리카 Oleanders, 1888
세 번째 꽃 그림은 강렬한 색채에 강렬한 삶의 열정이 느껴졌다. 화병 옆에 놓인 책은 에밀 졸라의 <생의 기쁨>이라고 나중에 알게 되었다.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비관적인 소설인데, 평생 독서가였다는 고흐는 에밀 졸라의 삶을 해석하고 영감을 끌어내는 방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빈센트가 사랑한 책, 86p) 빈센트 반 고흐가 불행한 이미지를 가졌다면, 그것과 그의 그림은 별개의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 같다. 바로 이 미술관에서 10년 동안 예술작품을 마주한 패트릭 브릴리의 말처럼, 예술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메트박물관 소장품 2백만 점 중에 단 석 점을 보았는데, 아무런 혜택 없이 입장료 35달러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일주일 후에 다시 금요일에 더 메트 박물관을 또 갔다. 이번에도 금요일이었으나 낮시간에 갔기 때문에 드디어 현지인의 손님패스를 이용해서 입장했다. 보통 5달러 이내에서 본인이 원하는 만큼 지불해도 되는 시스템인 것 같다. 대강 들리는 말이 그랬다. 내가 메트에 다시 들리겠다고 한 것은 그림 외에 다른 박물도 둘러보고도 싶었고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반 고흐의 그림 때문이었다. 꽃 그림을 다시 보고, 첫날 아이리슬에 감탄하고 돌아설 때 얼핏 본 그림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아이리스 옆에 걸렸으니 반 고흐의 그림이겠으나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첫걸음>이었다. 나는 처음에 모네나 다른 사람의 그림처럼 보았다. 색감이 환하고 가벼움 마저 들었다.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아빠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그 아빠를 향해 걸어가는 아기를 담았다.
반 고흐, 첫걸음 밀레 모작 (First steps, after Millet) 1890
고흐의 동생 테오의 아들이었다. 테오는 첫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그림은 밀레의 구도를 고흐가 그린 모작이었다. 고흐는 이 그림을 테오의 아들에게 주었다. 아마 모든 사람이 이 그림을 보면 나와 비숫한 생각을 할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는 고흐 자신은 가정을 꾸리기 어려웠으며 더군다나 아이는 상상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테오가 없었다면 자신의 삶이 불행했을 것이라던 고흐는 동생의 가족을 한 화면에 담았다. 세상의 모든 가족이 느끼는 행복한 순간을. 다른 어떤 그림보다 밝았으나 안타까움과 슬픔이 솟아오르는 그림이다. 아빠를 맞이하고 있는 서있는 엄마와 아들이 반 고흐의 그림과 편지를 세상에 알린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서울에 돌아와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