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흔히 겪는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곳은 뉴욕 JFK 공항이었다. JFK는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의 이니셜로 그를 기리는 공항인데, 나의 뉴욕에 대한 이미지를 단숨에 현실로 바꿔준 곳이다. 존 에프 케네디가 누구인가. 마흔네 살에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된 인물, 카 퍼레이드 도중 암살당하는 끔찍한 일로 끝났지만, 숱한 역사적 문화적 아이콘으로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의 국제 공항이라는 이미지, 게다가 존 F. 케네디가 가진 역사적 상징성에 전혀 대응시킬 수 없는 규모였디.
이른바 공항 1층 입국장 문이 열렸을 때, 나는 외국 어디 작은 마을 공항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입국장 문앞에 마중 나온 듯한 사람들과 나의 거리가 한 열 걸음쯤 되었다. 그들 뒤로 다시 열 걸음이 채 안 돼 공항 밖으로 나가는 출입문이 보였다. 나는 90년대 말 대구 공항이 떠올랐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가 내린곳이다. 2006년 가을에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도 떠올랐다. 입국장 문이 열리자마자 마중 나온 사람의 얼굴이 훅 들어와서 깜짝 놀랐었던 일이. ‘여기가 JFK공항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옆을 돌아보니 약간의 음료와 과자를 파는 가게가 하나 있는데, 한국에서느 보통 고속 버스 터미널에 가면 저런 가게가 나란히 있다. 위를 올려다보니 예상보다 낮은 천정에 미국 국기가 걸려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건 맞구나. 인천 공항 에스컬레이터의 1/2 정도의 길이라고 할까 1/3 정도라고 할까. 미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1층에서 본 것과 비슷한 가게들이 나란히 있었다. 생수를 사려고 들어가 500ml 병을 드니 6달러였다. 한국돈으로 거의 8천 원이네. 가장 저렴한 것이 4.5달러 정도였다. 시골 버스 터미널 같은 곳에서 공항이랍시고 작은 생수 한 병에 6000원쯤 하는 것인가. 물가가 살벌하다는 뉴욕이 맞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서울에서 지인이 나의 뉴욕행이 궁금해서 보낸 문자였는데, 지금 뉴욕 공항에 도착했다 하니 "캭~~ 뉴욕!" 이런 답신을 보내왔다. 다른 의미로 나도 '캭!' 하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나는 거기가 JFK 공항에서 가장 조악한 1 터미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첫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내가 JKF라는 인물을 알아온 시간 동안 아니, 애초에 나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다. 지식이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말은 진리다.
입국장 앞 편의 시설
설마...
2층은 출국장인데 대기 의자 바로 앞에 출국 대기줄이 있다. '마드리드 공항은 양반이었구나.' 거기 앉아서 사치스러운 생수를 마시며 멀더를 기다렸다. 지인의 약-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는 듯한 착각을 하며 졸린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니, 1층 입국장 출입문 너머 대기하고 있는 2칸짜리 흰색 모노레일이 보인다. 설마... 나는 멀더가 마중 나온다는 말에 비행기 타기 전에 짐을 3군데로 나눠 꾸렸다. 여행 캐리어에 작은 가방을 끼우고 배낭을 메는 식으로. 그리고는 혹시 몰라 멀더의 집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두었는데, 분명히 공항에서 에어트레인을 타라고 나온다. 에어 트레인 Air Train. 공항 철도가 지상으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설마 저것이 에어 트레인?저 모노레일은 어디 놀이 공원에 있는 거 아닌가. 푸핫.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위대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의 이름을 건 국제 공항에 관광용 모노레일을 두고 에어 트레인이라니. 역시 상품은 포장이 중요하다.
내가 정체모를 2칸짜리 열차에서 눈을 못 떼고 있을 때 누가 나를 톡톡 친다. 나를 데리러 공항까지 마중나온 멀더다. 나는 멀더를 보자마자 "저게 에어 트레인이야?"라고 물었다. 멀더는 ‘그게 지금 인사야?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그렇단다'. 맙소사. "아닌 저건 놀이공원에 있는 모노레일 같은데? "라고 내가 말하니, 그저 ’응‘ 이러고 한다. 지난 20년 동안 멀더를 2년 간격으로 봐서 그런지 익숙하면서,도 미국땅에서는 처음 보니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내 말의 뉘앙스를 멀더는 알고 있는 것 같다.
JFK 공항 에어 트레인
뉴욕 JFK 공항 2칸짜리 모노레일인 에어 트레인을 타니 경기도 경전철 모노레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중학교 2학년 때 센트럴파크를 처음 들은 이래, 뉴욕이라는 이미지는 오십이 넘도록 한 번도 수정할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제 상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에서 무엇을 보게 되는 건가. 자메이카 역에 내려 맨해튼 도심으로 들어가는 롱아일랜드 기차로 갈아탔다. 출퇴근용 기차란다. 멀더는 조금 전의 나의 '현실 인식'이 '실망'으로 들렸는지, 이 기차는 예전의 비둘기호 같다고 했다. 비둘기호? 내가 비둘기호 이름을 잊는 지도 수십 년 된 듯한데, 멀더는 대체 그런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기차는 통일호 정도는 되었다.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 기차를 같이 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뉴욕 외곽 마을 풍경은 정겨웠다. 어제 눈이 내렸다는데, 낮은 서양식 주택 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풍경이 마치 어렸을 적에 주고받던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오는 외국의 집들 같았다.
시간은 오후 1시를 넘어가고 있었는데 평일 대낮이라 그런지 빈자리가 많았다. 표 검사를 하러 다가 온 사람은, 철도 유니폼 모자를 쓰고 부스스한 금발머리를 양쪽으로 늘어뜨린 여자 역무원이었다. 마치 <은하철도 999> 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메탈의 나이 든 모습이랄까. 기차표는 따로 끊지 않고 교통 카드로 되는 모양이다. 나이든 얼굴의 역무원은 바코드 스캐너 같은 것을 한 번 멀더의 폰에 틱! 대고는 다시 자리로 가셨다. 기관실은 아닌데 역무원만 들어가서 서있는 자리가 있는 것 같다. 멀더의 보충 설명이 따르면, 지하철 노조 회원이란다. 노조에 가입한 사람은 일정한 일을 의무적으로 받고 몇 시간이든 의무적으로 일해야 한다고. 아 그렇구나. 지난 20년 동안 서울을 들락날락하는 멀더에게 항상 새로운 장소나 그간의 변화를 소개한 나다. 거꾸로 내가 멀더의 나라에서 그의 설명을 들으니 새로운 만남인 듯한 기분이다.
멀더가 사는 동네로 가는 지하철로 갈아타려고 드디어 악명 높은 뉴욕 지하철 한 복판에 이르렀다. 만 하루를 깨어있는 상태이니 첫 인상이 선명하게 남아있지는 않지만, 지하철 안팍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더나 엘리베이터가 부족하여 거의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사람들이 서 있는 공간이 너무 좁은 데다 스크린 도어도 없어 매우 위험해 보였다. 처음 뉴욕에 간다면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을 경우 짐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 좋겠다. 옷차림은 크로스 오버 (cross over) 스타일, 그러니까 어느 시대의 옷을 입는다해도 하등 눈에 뜨지 않을 것 같은 뉴욕, 맨해튼 34번가 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