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발이 조금 날리는 첫 번째 토요일 아침. 봄기운은 아직이고 바람은 여전히 춥게 느껴지는 2월 중순 뉴욕의 날씨는 서울하고 비슷한 것 같다. 헤어드라이어를 가지고 오지 않아 손선풍기로 머리를 말렸다. 집주인들이 헤어드라이가 있다고 알려줬는데 어디에 있는지 그날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오전 10시 정도에 시작하는 조조 영화를 예매해 두었다며, 같이 보겠냐고 집주인 중 한 명인 멀더가 내게 물었다.
멀더와 나 사이에 20년간 한 번도 빼놓지 않은 대화 주제가 있다면 그건 '영화'다. 멀더는한국 영화 팬이다. 20년 내내 한국 영화 개봉작을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2003년 4월에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는데, 지난 2022년에 한국에 왔을 때 살인의 추억의 진짜 범인이 잡혔다는 사실을 서울에 들어오자마자 확인했다며, 우리만큼 충격받은 표정으로 말하기도 했다. 20년 전에 본 한국 영화가 던진 궁금증과 사회적 의미를 여기 살고 있었던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영어로 번역된 한국 영화의 원제목을 빽빽이 적어 놓은 종이가 너널너덜해질까지 들고 다녔다. 비록,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정>을 본다고 했을 때 박장대소하며 웃기도 했었지만.
뉴욕 한복판에서 영화를 볼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데, 무슨 영화일까. 내가 잘(?) 아는 '쥴리엣 비노쉬'가 나온단다. 프랑스 영화라고? 영어라면 그냥 대충 참고 듣겠지만, '프랑스어는 10분만 들어도 울렁거리는데' 하니 '영어 자막'이 있단다. 영어 자막... 멀더는 보통의 한국인들처럼 내가 회화는 그럭저럭인 반면 읽기(독해)는 좀 된다고 생각한다. 시차는 여전히 적응 중이고 우중충한 날씨에 아침 일찍 움직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내가 누군가의 일상 속에 들어왔으므로 따라나섰다.
AMC 영화관(AMC Empire 25)은 타임 스퀘어에서 가까웠다. 타임 스퀘어 광장으로 들어가는 옆구리(?)가 보인다. 극장 위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며, 내가 맨해튼 저 길바닥에서 받은 첫 느낌을 떠올려 본다. 차도든 인도든 유난히 평평하다.내 평생 길바닥에 대해서 이렇게 궁금해진 적은 또 처음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걸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을잠시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말이다.
내가 보름동안 머물렀던 맨해튼 북쪽 동네는, 숙소 앞 사거리에서 어떤 길로 이동하든 높낮이와 곡선이 있다. 보통 어느 도시를 가나 길이 이런 식이지 않나. 그런데 맨해튼 중심부로 들어가면 앞뒤 좌우로 난 모든 길이 지나치게 평지다. 도시를 건설할 때 행정 구역을 남북으로 동서로 거리의 번호를 지정하면서 도로를 내며 땅바닥을 다졌겠지. 그것은 당연지사. 길을 내고 아스팔트로 덮어야 도시의 교통수단인 바퀴가 굴러간다. 한국의 강남 지역도 70년대 미나리 밭이나 배밭을 다져서 도시의 길을 만들고 좌우로 빌딩이 즐비해졌다. 그렇다고 맨해튼처럼 학교 운동장 다진 듯이 완전한 평지는 아니다. 맨해튼 길바닥을 보고 있노라니 지나치게 인공 도시라는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영화관은 예전에 오페라 극장이었다고 한다. (커버사진) 토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영화관은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의 한국 영화관처럼 한산했다. '2시간짜리 프랑스 영화면 나는 잠이나 자면 되겠다'는 플랜 B를 세우고 따라나선 것인데, 사람이 너무 없으면 편히(?) 잘 수가 없지 않나... 영화관의 규모에 비해 현재 상영작도 시원치 않았고 코비드의 강타 이후 영화관의 사정은 여기서도 심상치 않나 보다고 추측해 볼 뿐이다. 자리를 잡고 앉아보니몇 줄에 한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는데, 스크린과의 거리, 앞사람 뒤통수와의 거리감이 한국의 영화관과 다르게 가까웠다. 둘러보니 객석은 부채꼴처럼 퍼진 구조에 천정도 낮고 계단과 계단사이도 전체적으로 낮았다. 마치 유럽의 축구장처럼 스크린을 매우 가까이서 보는 느낌이다. 오페라 극장의 무대를 올려보듯이. 이런 구조라면 혹여 앉은 앞 좌석에 키가 큰 사람이 앉아도 영화의 중요한 장면을 못 보는 불행한 사태는 방지가 되겠다.
상영 중인 클래식 영화가 많다.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와 한때 그의 실제 남편이었다는 남자주인공(브노아 마지벨)으로 하는 요리 영화였다. 다행히(?)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 대사였다. 천재적인 요리 감각을 타고난 줄리엣 비노쉬가 포토푀(Pot Au Feu)를 만드는 전 과정이 나온다.... 프랑스 영화니까... 영화는 시각적 이미지를 읽는 것이기에 내용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미국 개봉 타이틀은 < the taste of things> 였는데, 한국에서는 <프렌치 수프>라고 지었다. 상영시간이 135분, 2시간을 넘지만 수프를 만드는 과정, 요리에 감탄하는 사람들, 그녀를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남자, 우연히 발견한 맛의 재능을 지닌 소녀 등. 대사가 지장을 주는 영화는 아니다.
트란 안 훙(Tran Anh Hung)의 프랑스 영화가 도자기 굽는 취미를 가진 홍(Horng)의 예술혼을 지폈는지,이틀 후에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홍은 평소와는 다르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을 만들었다. 예전 백과사전 만한 요리책에서 한 장 떼어낸 듯한 레시피가 주방에 올려져 있었다. 수프는 아니고 오븐에 사과와 함께 구운 닭고기 포토푀(Pot Au Feu)다. 형광등이 아니라서 요리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아 유감이나 사과의 달콤함이 허브향이 닭고기에 잘 배어있었다. 훌륭한 맛이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 놓은 <요리 백과사전>을 본 것이 시쳇말로 오백년 만인 것 같다. 지나치게 인공의 느낌을 주는 도시 뉴욕에서 살아가는 뉴요커의 실제 생활 모습은 대단히 아날로그적이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