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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화 Jul 23. 2016

여름밤이 시작되었다

덥다 덥다 정말 덥다


연차를 냈다. 딱 삼일. 7, 8월에 휴가를 안 간지는 꽤 오래됐고 길게 쉬는 게 그다지 필요치 않았던지라 가끔 오후 반차나 연차를 하루씩만 내 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 그동안의 패턴이었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연차를 낸 건 사실 평범하진 않지만 그리 대단치도 않은 이유다. 아이를 봐주시는 분이 시골에 볼 일 보러 가시면서 아이를 구경시켜주시겠다고 데리고 가시는데 아이의 부모가 부록으로 함께하는, 뭔가 애매하지만 낯설지도 않은 그런 계획 때문이었다.


주일 오후에나 출발이 가능하기 때문에 월화수를 붙여낸 것이었는데 출발만 그때지 사실 금요일부터 휴가가 시작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마음을 그 날에 맞춰 세팅해놓고 토일, 평범한 주말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당장 설렘을 장착해야만 했다. 게다가 혼자인 저녁. 또 한 번의 찬스다. 컨디션이 좋진 않았지만 아무리 집을 좋아해도 오늘만은 그대로 고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가의 시작을 알차게 보내면 실제 시간보다도 굉장히 더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 때문에 나는 나의 단순함을 이용하기로 했다.


우선 돈 쓰러 가자. 아이 물건, 남편 물건 사는 일에만 혈안 되지 말고 나를 위한 쇼핑을 떠나자. 맘에만 두고 있던 운동복을 하나 구입했다. 무려 백화점에서 노세일 브랜드를 겁도 없이 질렀다. 아, 기분이 좋구나. 솔직히 최근 쇼핑을 전혀 못한 건 아니었다. 회사에 입고 갈 옷도 사고 여름이라고 가벼운 가방도 하나 구입했었다. 하지만 잘못되어가는 버젯팅에 억눌려 느껴지던 죄책감과 답답함은 오늘만은 고이 접어두기로 한다.

외롭지도 않으면서 저녁 먹는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혼자 잘 있다는 문자를 남기고 불쌍함이 가미된 감성팔이의 시간을 잠시 가졌다. 그리고는 올리브영에 들려 팩 몇 장과 미용 소품 등을 구입했다. 평상시에 머리를 스쳐가던 물건을 살펴보고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 쓰게 될 쓰임새를 갖춘 것들을 골라 담았다. 마트를 가서도 언제나 필요한 물건만을 전투적이고 저돌적으로 집어 담아 시간을 단축하는 엄마이자 절대 주부이던 나는 평상시 모습을 지우고 세상 더는 갈 곳 없는 여자처럼 더디고 여유롭게 구경하고 만져보며 비싸지도 않은 물건을 5만 어치나 담았다.


손은 무거웠지만 기분은 날아간다. 운동복이며 이것저것 돈 쓴  내역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리라. 그리고는 서점에 들러 읽겠다 마음먹었던 책 한 권을 급하게 사들고 홀연히 나왔다. 차를 몰아 집에 도착해서는 에어컨을 세게 틀고 낮동안 달궈진 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집 안의 열기를 식혔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시간을 투자해 꼼꼼히 세안하고 나를 위한 날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그리고는 락킹 체어를 옮겨 가장 시원한 곳에 두고 온 집에 불을 밝혔다. 오늘 밤은 일찍 잠들 수가 없다. 내일 해야 할 일과 컨디션 조절을 위해 침대에 눕던 평상시와는 다른 밤이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름밤은 오늘 하루일지도 모른다. 그 밤이 지나가고 있다. 아니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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